완벽한 고백
소금
감히 단언한다.
완벽한 날이었다.
공기는 미세먼지 매우 좋음, 초미세먼지는 매우 매우 좋음의 상태로 맑다. 완연한 봄으로 넘어가는 지금, 온도 또한 적당히 따뜻하다. 꿉꿉한 습기도 느껴지지 않는 상쾌함이 체감되는 날, 하늘이 반짝이는 오늘, 쿠로바 카이토는 고백을 결심한다. 그냥 고백도 아닌,
완벽한 고백을.
그리고 실제로 완벽했다.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늘 좋아했어. 소꿉친구라거나 우정의 의미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다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또 소중하게 대할게. 아오코, 나랑 사귀어줄래? 라는 대사와 약간의 떨림까지. Perfect. 정말 완벽한-
“아, 음… 고백 고마워, 카이토.”
-줄 알았다. 속으로 이어지던 자화자찬과 들뜬 기분을 끊어내는 것은 거절을 내포한 음성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나리오의 오류라고 볼 수 있다. 아니야, 이러지 마. 그는 그 거절이 거짓말이길 간절히 바란다.
“아오코를 좋아한다는 거지? 아오코도 카이토를 좋아해. 그렇지만….”
하지만 하늘이 언제 자신의 편인 적이 있던가. 망설이는 상대의 말에 의문이 든다. 그럼 사귀면 되잖아? 그러나 마주 본 이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감돈다. 아예 생각하지도 못한 스토리 흐름에 몸이 굳는다.
“아오코는 아직 그 고백은 받아 줄 수 없어, 카이토. 미안해.”
완곡한 거절이 그의 발목을 잡고 바닥 저 아래로 끌어 내린다. 절망이 찾아온다.
이렇게 그의 완벽한 고백은, 망했다.
그것도 아주 대차게.
/
-난 쿠로바 카이토라고 해! 잘 부탁해!
카이토는 어쩌면 제 생에 있어 최초의 고백일지도 모를 순간을 떠올린다. 시계탑 아래의 그날은 오늘처럼 반짝였다. 기억은 본래 미화가 되는 법이라, 오래된 기억을 꺼내보는 것은 추억 보정이 되어있기 마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카이토에게 있어 아오코와의 추억은 빛이 바래도 늘 아름답다. 어떤 식의 미화가 되었든 간에, 모든 순간에서 아오코가 눈부시게 반짝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므로.
그날은 이웃 친구가 없는 자신을 늘 걱정하는 부모님에게 오늘만큼은 친구를 사귀어오겠단 호언장담을 했던 어느 날이었다.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은 걸음은 합리적인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근처 역 앞에는 시계탑과 함께 공원이 있다. 날도 화창하니 그곳에는 제 또래의 친구들도 많을 거라는 지극히 합리적 추론.
겸사겸사 미팅 끝내고 돌아오는 아버지도 기다리지 뭐. 무념무상으로 길을 걷다가 제 주머니 속의 장미가 생각났다. 카이토는 오늘 아침 미팅에 나갈 준비하고 있던 아버지에게 익혔던 마술을 선보였다. 그에 대한 답례로 받은 파란 장미를 꺼내 이리저리 하늘에 비추어 본다. ‘꼬마 마술사 군이 멋진 공연을 보여줬으니, 답례를 줘야겠지?’라고 말하던 아버지의 웃음에는 기특함이 서려 있었다.
“불가능과 기적이라고 하셨지?”
자연적으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색의 장미라 ‘불가능’이란 꽃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공적 품종 개발이 되면서 ‘기적’이라는 뜻이 생겼다고. 그 설명을 들었을 때 카이토는 문득 마술을 닮은 꽃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아버지가 말해주셨듯,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기적’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 마술쇼의 시작은 이것이니까. 그래서 카이토는 이번의 답례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어느덧, 시계탑 공원 도착이다.
그리고 그 어린 날의 합리적 추론의 끝은 다름 아닌, 오래된 시계탑 아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한 소녀로 도달된다.
하늘이 반짝이는 날, 만화에 나올 것 같은 몽글한 구름이 가리고 있던 햇빛을 피해 달아난다. 동시에 시계탑에 드리운 그림자가 걷힌다. 때마침 불어온 선풍이 소녀의 짧은 단발을 간질이고 도망쳤다. 소년의 시야에 그 모습이 들어온다.
소년, 쿠로바 카이토는 잠시 숨을 삼킨 채로 잠시 세상이 멈춘 듯한 기분에 빠져든다. 모든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려던 소녀의 얼굴이 들린다. 깜빡이는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밤하늘의 푸른 달처럼 맑았고, 새파란 바다를 담고 있었다.
풍덩! 어디선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났다.
“예쁘다….”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최초의 감상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에 겨우 정신을 차린 카이토는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안 들렸겠지? 주말 낮 공원이라 사람이 꽤 많았다. 소녀와도 꽤 거리가 있었고, 웅성거리는 소리 덕에 제 소리는 묻혔을 것이다.
아, 귀가 뜨겁다. 카이토는 열이 오른 귀를 벅벅 문질렀다. 친해지고 싶어. 이름은 뭘까? 이 주변에서 살까?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홀린 듯 소녀를 바라보던 카이토는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어째서? 소녀의 얼굴 위로 드리운 그림자에 대해 의문한다. 태양이 햇살을 뽐내며 그림자 또한 사라진 지금에도 소녀의 얼굴은 어둡다. 단서를 찾듯 주변을 둘러본다. 주말 낮 공원, 사람이 많다. 부모와 함께 나온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없어.”
없네? 없어. 응 확실히 없지. 주변을 둘러봐도 소녀에게 다가오는 어른은 없었다. 그러니까, 소녀는 혼자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으리라. 소년, 쿠로바 카이토는 문득 갈증이 나는 것을 느낀다.
‘웃는 걸 보고 싶어.’
무료한 일상에 강렬한 목적이 생겼다. 이름조차 모르는 소녀와 어떻게든 얽히고 싶다는.
머뭇거리던 발걸음에 확신이 생긴다.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굴려보는 시뮬레이션에 긴장을 삼킨다. 잘할 수 있을까? 좋아할까? 좋아하면 좋겠다. 소 매로 숨긴 장미 꽃잎이 손목을 간질거린다. 아버지가 그랬잖아.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기적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 그게 바로 마술쇼의 본질이라고.
심장 고동 소리가 점점 커진다.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한 쇼. 몇 걸음 만에 소녀의 지척으로 다가온 소년은 기척을 숨긴다. 소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우울한 낯을 하고 있다. 밝게, 밝게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이건,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한-
“어? 너도 누구 기다려?”
긴장을 숨기고 말을 건다. 제 목소리에 소녀가 고개를 들었고, 마침내 눈이 마주쳤다. 낯선 또래가 말을 걸었기 때문인지 놀란 티가 난다. 그 모습이 귀여웠다. 그리고 역시,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쁘다. 맑은 눈동자 위로 비친 제 모습은 언제나처럼 태평하다. 좋아, 잘하고 있어. 아니 사실 잘 모르겠어. 그래도, 얼굴로 드러내지 말기. 포커페이스, 포커페이스. 속으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소녀의 답이 돌아오기를 바란다.
“응…. 아빠랑 만나기로 했어…. 하지만 일이 바빠서 못 갈지도 모른다고 해서….”
“…….”
소녀의 얼굴 위로 다시 그림자가 드리운다. 마음속 무언가가 덜컥이며 떨어지는 감각에 손끝이 방황한다. 아, 역시. 웃어주면 좋겠다. 그런 우울한 얼굴은 예쁜 얼굴에 어울리지 않으니까. 카이토는 쇼를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천천히, 긴장하지 말고. 소년이 주먹을 내밀며 동시에 말한다.
“나는 쿠로바 카이토라고 해! 잘 부탁해!”
작은 손에서 파랗게 핀 장미가 햇빛 아래서 제 아름다움을 뽐내며 반짝거린다. 동시에, 슬픔과 외로움이 걷힌다. 맑은 눈동자가 오롯이 기쁨으로 반 짝거렸다. 놀란 듯 상기된 얼굴에 그림자는 어느새 사라진 채다. 놀라움이 사라진 얼굴 위로 떠오르는 것은, 환한 웃음이다. 아, 소녀가 웃는다.
그것은 오랜 장마가 그친 뒤 흐린 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햇살 같았다. 아니, 태양 아래서 반짝이는 바다를 닮았을지도 몰라. 마술의 성공 여부와 별개로 카이토는 문득 이 순간을 영원히 뇌리에서 잊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아까의 풍덩 소리는 어디로 빠졌길래 났을까? 이제 소년은 정답을 안다.
이것은 첫사랑이다.
/
카이토가 회고하기를 고등학교 2학년은 정말 바쁜 한 해였다고 자부한다. 괴도 키드가 아버지였던 것을 알게 되고,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조직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노리던 보석이 판도라임을 알아내 그 판도라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아버지의 죽음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서 소매 걷고 동분서주하느라 몸이 열 개여도 부족했다.
이래저래 많은 일이 있었지만, 카이토는 무사히 판도라를 찾아냈고, 조직 또한 최대한 온건한 방식으로 무너뜨렸다. 혼자서 이뤄낸 것은 아니었다. 괴도 코르보와의 협동으로 이뤄냈다고 봐야겠지.
‘문제는 아버지도 아직 살아계셨다는 것에 있나….’
이건 ‘이래저래 많은 일’에 포함하기에는 스케일이 좀 큰가? 머쓱해진 카이토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모든 일이 일단락된 이후에 모든 사정 설명을 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듣기로는 그때 마술쇼 장에서 일어난 사고는 조직이 저지른 것이 맞다고 한다. 판도라와 관련해서 아는 정보를 가지고 대립하다가 조직이 먼저 사고를 쳤다나.
하여튼 아버지는 그 사고에서 간신히 죽음은 면했지만 크게 다쳐 회복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이라는 소견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차라리 이 점을 이용해 세상에서 쿠로바 도이치라는 사람을 지우는 것이 조직과 대립하기에는 더 낫다고 판단하셨단다.
그 이후 겨우 회복한 이후부터는 미국 라스베이거스 등지에서 정체를 숨기고 마술사와 괴도 코르보로 활동하셨고, 동시에 어머니에게는 사정을 털어놓은 모양이다. 애초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계획을 대강 알고 계신 듯했지만. 어쨌든 그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괴도 코르보로서 등장한 뒤, 조직을 끝내 궤멸시키고, 현재는 ‘러브러브 부부 여행’ 중이시다.
솔직히 죽음을 가장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성적 이해와는 별개로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다. 그래도 상황 설명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잖아? 그 판단이 하루아침만에 젊은 부인을 과부로 만들었다. 그뿐이냐? 아니, 어린 아들은 영문도 모른 채 존경하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래 놓고 하는 소리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면 우리 가족이 위험해질 것 같아서 그랬다. 그래도 역시 너를 홀로 두게 만든 것은 내 잘못이 크구나. 미안하다, 카이토.’란다. 하여튼 미워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선수 아니야, 이 사람.
물론 미워하지 못하는 것과 괘씸한 것은 별개의 일이라서 존경하는 아버지고 뭐고 한 3주 정도는 없는 취급을 하긴 했다. 8년 넘게 죽어있었는데 3주 정도 추가 된다고 해서 뭐 그렇게 차이가 있겠어. 뒤끝 좀 부렸다.
뻔뻔한 낯 때문에 짜증 나는 것과 별개로 제일 짜증이 났던 점은 어떠한 설명도 없이 저를 사건에서 배제하려는 태도였다. 이 상황까지 온 이상 저의 일이기도 했는데, 함부로 선을 긋는 모습에 화가 났다.
근데 내가 누구야? 생사마저 다 숨긴 어떤 남자의 고집 하나는 제대로 물려받지 않았나. 거기에 굴하지 않고 나름대로 고집부려서 조직 괴멸까지 함께해서 얼마나 다행인가. 카이토는 이상한 부분에서 뿌듯함을 느낀다.
각설하고, 길고 긴 사정 설명이 끝난 지금에는 쿠로바 도이치는 마술사로서 성공적인 부활 쇼를 했다. 그리고 쿠로바 카이토는 무사히 고등학교 3학년을 마쳤다. 그렇게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와 일상을 이뤘다.
그리고 오늘은 길고 길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졸업식 날이다. 작년, 괴도 키드 활동으로 이래저래 시간을 뺏긴 것치고는 점수도 나쁘지 않았다. 뛰어난 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고3 수험 생활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목표는 자신의 소꿉친구이자 첫사랑인 나카모리 아오코와 같은 대학교 들어가기. 그리고 비록 학과는 달라도 목표 달성까지 훌륭하게 해냈다. 그러니까 그다음 목표를 실행할 차례다.
‘고백하기!!’
아주 오래전부터 간직해온 마음을 이제는 전달해도 되지 않을까? 매번 아오코는 아직 어린애 같은 면이 있으니 모를 거라고, 연애에도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몇 번이고 고백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그런데, 올해로 들어오게 되면서 그 생각은 크게 뒤집혔다. 아오코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하니까 느낌표는 3개 붙인다. 단순히 의식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냥 단지 ‘소꿉친구’가 아닌, 진짜 ‘남자’로 의식하고 있다는 것에 카이토는 감동했다.
그렇게 카이토와 아오코는 흔한 썸을 탔다. 썸, 썸을 탔다고. 카이토는 틈만 나면 이게 얼마나 중요한 포인트인지 강력하게 설파했다. 그 안타까운 대상은 주로 하쿠바 사구루였다.
초반에는 자비롭게 흘려듣던 하쿠바는 결국 카이토의 목소리를 깔끔하게 노이즈 캔슬링하는 경지에 올랐다. 서럽진 않았지만, 짜증은 났지. 나라고 좋다고 그놈의 ‘아카코 양’ 칭찬 들어줬냐? 하여튼 탐정들은 속 좁고 매정해요. 속으로 툴툴거린 카이토가 현관문을 연다.
“늦었잖아! 카이토 얼른 나와.”
들려오는 목소리가 익숙하다. 우리 얼른 학교 가야 하잖아. 빨리 와. 재촉하는 음성이 다정한 탓에 매일 듣고 싶다고 하면 난 중증이겠지. 카이토는 쉽게 긍정한다. 그치만 역시 부정할 생각도, 약을 처방받아 치료하고 싶지도 않은걸. 태양 아래서 빛나는 제 소꿉친구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다.
/
지루한 졸업식이 끝을 보일 무렵, 창밖으로는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교장의 축사라는 건 원래 카페에서 흐르는 은은한 BGM과 같다. 그를 적당히 배경음으로 삼은 카이토는 천천히 오늘의 계획을 세운다. 음, 역시 고백은 시계탑 앞에서 하고 싶어. 그치만 이렇게 꽃비가 잔뜩 내린다면, 하굣길 중에 있는 공원도 좋을지도 몰라. 그곳은 벚꽃 명소로 유명했다.
자연스럽게 하고 싶다.
누군가는 작년 1년 동안 세상을 휩쓴 괴도 키드답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화려한 것도 좋고, 펑펑 터지는 소란스러움도 좋다. 그야말로 파티! 같은 분위기도 다 좋다. 그러나 고백하는 그 순간만큼은 오로지 진심만으로 채우고 싶었다. 진심만을 담은 담백함에서 오는 감동이라는 게 또 있지 않은가?
탐정네들 같은 진부하고 꼬장꼬장한 놈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낭만. 그런고로 오늘만큼 완벽한 날은 없다. 고백하기 딱 좋은 날이라고.
그리고 그 시작도 완벽했다. 소란스러운 졸업식의 끝을 맺고, 돌아가는 길에는 언제나처럼 자신과 아오코 둘 뿐이다. 오래된 법칙과 약속.
나란히 걷던 중 아오코는 흩날리는 벚꽃을 보고는 공원을 가자고 한다. 아마도 꽃구경을 좋아하는 아오코니까 놓칠 리가 없을 것이고, 당연히 구경하러 가겠지. 공원에는 활짝 핀 벚꽃과 적당히 부는 바람에 의해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다. 그것은 로맨스 영화 속 펼쳐지는 클리셰라 할 수 있겠다.
둘은 그 꽃비 속에서 멋진 광경을 홀린 듯 바라본다. 아, 물론 나는 너를 보고 있겠지. 그 아래의 너는 찬란 그 자체이므로. 그리고 거기서 나는 말한다. 이를테면 이렇게.
“아오코.”
“응? 왜 카이토?”
갑자기 불린 아오코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본다. 너는 이 속에서도 반짝이고 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다. 손바닥은 긴장으로 축축하다. 언젠가 나갔던 마술사 그랑프리 대회에서도 긴장하지 않았던 몸은 단 한 사람에 의해 뻣뻣해진다. 마른 혀로 입술을 축이며 첫 마디를 내뱉는다.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늘 좋아했어. 소꿉친구라거나 우정의 의미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
“다른 누구보다도 너를 행복하게, 또 소중하게 대할게. 아오코, 나랑 사귀어줄래?”
목소리에는 긴장이 가득했고 그 탓에 약간 떨렸다. 아, 앞을 못 보겠어. 그치만, 이제 ‘Okay’ 해줄 차례잖아? 아오코, 왜 답이 없어? 불안해진 탓에 나는 약간 내렸던 시야를 올려 아오코의 얼굴을 마주한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아, 음… 고백 고마워, 카이토.”
난감한 얼굴. 고백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비상경보등이 켜진다. 그러므로. 이런 건 시나리오의 오류라고. 이럴 리가 없잖아? 거짓말. 그는 꽤, 엄청 간절했다.
“아오코를 좋아한다는 거지? 아오코도 카이토를 좋아해. 그렇지만….”
좋아한다고? 내가 말한 의미와 똑같아? 그럼 사귀면 되잖아? 그러나 마주 본 이의 얼굴에는 여전히 난감한 기색이 감돈다. 이런 건 예상해 본 적 없어.
“아오코는 아직 그 고백은 받아 줄 수 없어, 카이토. 미안해.”
허리까지 숙이며 아오코가 말한다. 완곡한 거절이다. 이건.
감히 단언한다.
오늘은 완벽한 날이었다.
공기는 미세먼지 매우 좋음, 초미세먼지는 매우 매우 좋음의 상태로 맑다. 완연한 봄으로 넘어가는 지금, 온도 또한 적당히 따뜻하다. 꿉꿉한 습기도 느껴지지 않는 상쾌함이 체감되는 날, 하늘이 반짝이는 오늘, 쿠로바 카이토는 다시금 고백을 결심했다. 진행 과정까지 완벽했다. 그러므로 남은 것은 승낙, 일 텐데.
완벽한 고백의 끝은 해피 엔드여야 하는데. 카이토는 머쓱하게 웃으며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려고 노력한다. 아니, 사실 기억도 나지 않는다. 쩍, 사고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갈라진 정신이 두 조각, 네 조각, 여덟 조각… 결국 가루가 될 때까지 붕괴한다.
“아니야, 괜찮아. 일어나라고 아오코. 난 괜찮다니까. 고백은 안 받아줘도 돼. 그래도,”
카이토는 두서없이 말을 내뱉었다. 나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지? 괜찮아 보일까? 포커페이스 따위는 이미 잊어버렸다. 그렇다고 했던 말이 다 장난이라고 하면서 무마하고 싶지 않다. 그가 전하려던 것은 가벼운 마음도, 찰나의 용기도 아니었으니까. 아, 그러니까 나는, 나는-
“그래도 우리는 소꿉친구잖아?”
친구라는 위치까지 잃을 수 없어.
/
차였다.
완벽하게 차였다. 고백 이후의 기억은 흐릿하다. 자신이 구질구질하게 친구 자리라도 잃지 않으려고 매달렸다는 것만 선명하다. 아니지, 또 있다. ‘푹 쉬어, 카이토.’ 하고 말하던 상냥한 말도 기억난다. 아오코의 목소리를 어떻게 흘려듣겠어. 그건 영혼에 새겨진 본능과 같다.
다시금 고백 장면을 재상영해 본다. 가관이다. 아, 바보멍청이똥개말미잘왜살지진짜나가죽을까. 자기 비하 발언을 쏟아낸 카이토는 베개 위에 머리를 파묻었다.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른다. 아 그냥 천천히 생각해 보고 답 달라고 할걸!! 당황한 탓에 여유를 잃었던 것이 큰 패착이다.
최근 카이토는 아오코를 피하는 것에 필사적이었다. 최대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10년 이상 동안 간직해 온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단순한 ‘좋아해’보다 ‘사랑해’에 가깝다. 차라리 말하지 말걸. 죽을 때까지 숨길걸. 그랬으면 차라리 지금보단 나았을지도 몰라. 자만했던 탓에 범한 오류가 뼈아프게 다가온다. 그러나 쿠로바 카이토는 나카모리 아오코의 거절에는 면역이 없다.
그래서 더더욱 아오코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거기에 졸업식 이후 약 2주 뒤에는 대학 입학식이다. 오늘은 졸업식 이후 딱 3일이 지난 시점. 그 이후에는 빼도 박도 못하게 아오코를 마주해야 한다. 대학 생활만큼은 단순한 소꿉친구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역할을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가 꽤, 많이 필요하단 말야.
이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안다. 그러니 더더욱 이 마음이 그 애한테 부담으로 느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카이토, 자신이 가장 견디기 어렵다는 걸 안다.
그렇게 홀로 침잠하는 카이토를 수면 위로 끌어당긴 것은 한 전화였다. 첫 번째로 울리는 전화는 받을 힘도 없어서 무시했다. 그다음으로 울리는 전화는 이 휴식에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울리는 전화는 그 상대를 확인하고는 그냥 끊어버렸다. 이쯤 되면 포기할 법도 한데, 상대는 자신만큼, 아니 자신보다 끈질긴 성정을 가진 탓일까? 끝내 네 번째로 울리는 전화는 마침내 결국 연결된다.
“뭐, 왜, 뭐. 뭔 용건인데!!”
“어후, 목청 좋은 걸 보니, 아직은 안 죽을 것 같네요.”
역시 괜한 걱정을 했네요. 태연하면서도 이 재수 없는 음성의 주인은 하쿠바다. 아 뭔 걱정이야, 네가. 분명하게는 제가 하는 걱정은 아니죠. 너 지금 나하고 말장난하냐? 아뇨, 사실만 말한 건데요. 아 하여튼 왜 전화한 거야? 설마 너-
“나한테 집착하냐? 졸업했다고 내가 막 그리워?”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렇게 정색할 거면서 뭔 전화를 네 번이나 하냐고요. 아 잠 다 깼어.”
“무슨 잠입니까? 실연당해서 울고 계실까 봐 연락한 겁니다.”
“누, 누가 실연을 당해?!”
댁이요. 뭐 울지는 않아도 약간 정신에 맛이 간 것 같긴 하네요. 퉁명스러운 목소리에는 어째 귀찮음이 감돈다. 아니 이럴 거면 대체 왜 연락하냐고. 발신인이나 수신인이나 달갑지도 않은 이 행위에 대해 의문을 품을 때쯤 하쿠바가 용건을 꺼낸다.
“역 앞에 새로운 디저트 카페가 오픈했다고 합니다. 초콜릿 파르페가 유명하대요. 1시간 뒤에 거기서 뵙죠.”
“그니까 내가 왜, 너랑, 그런 곳에서.”
“그 안에 당신과 못 만나게 되면, 상심한 제가 실수로 경찰청으로 향해서 괴도 키드 정체를 제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내가 괴도 키드가 아-,”
-니라고 몇 번을 말해…. 말이 맺어지기도 전에 끊긴 전화의 반대편에는 상대가 없다. 아이씨. 1시간 뒤 역 앞, 디저트 카페. 머리에 들어온 정보를 되새긴다. 씻고 준비하면 맞추긴 하겠거니 싶었다. 하여튼 우울하게 두지를 않아요. 카이토는 졸업식 이후 약 3일 만에 침대에서 내려와 방 밖을 나섰다.
/
멋진 모양으로 나온 초콜릿 파르페를 반 정도 비우자,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디저트 카페에서 밀크티나 마시는 놈의 용건 따위야 하나도 궁금하진 않지만, 오늘 비용은 다 본인이 부담한다고 하니 이정도 아량은 베풀 수 있었다.
“그래서 용건이 뭔데?”
“네?”
“여기까지 직접 행차해서 나한테 초콜릿 파르페를 주는 의미가 뭐냐고.”
“서론도 있는데, 들어볼 의향은?”
“걍 본론부터 말해.”
제 대답에 잠깐 고민하던 하쿠바는 순간 후련해진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연다. 뭐, 제 일은 아니니까요.
“실연당하셨죠?”
“나 간다.”
“아, 이게 아니라. 제가 당신을 부른 건 의뢰가 있어서예요. 그러니까 좀 급하게 일어나지 좀 말고 더 들어보시죠.”
“하, 빨리 말해.”
“아오코 군이 당신 고백을 거절한 이유,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대놓고 직구다. 직구다 못해 데드볼이라고. 성격 나쁜 투수의 공에 시퍼런 멍이 든 카이토는 다시금 바닥 아래로 뚝 떨어지는 기분 을 느낀다. 아, 이건 좋지 않다. 표정 관리가 안 돼. 그거야, 그거야-
“내가 남자로 안 보이니까 거절했겠지.”
“그게 아니라는 건 당신이 제일 잘 알지 않습니까?”
3학년 내내 ‘아오코가 날 남자로 본다고!’라는 강의를 청취했던 하쿠바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뭔 헛소리냐는 표정이지 저거 지금. 자신도 말해놓고 나서 흠칫하긴 했다. 확신이 없었으면 고백도 안 했겠지.
“원래 아오코는 속을 모르겠는 애잖아. 아니라는 법 있어?”
“뭐, 저도 거기에는 확답을 못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난 1년간 직접 봐온 경험에 근거하면 아오코 군도 당신을 좋아하는 것이 맞아 보이던데요.”
“…그래서?”
“마냥 우울해하면서 혼자 구질구질하게 친구 역할에 충실해지려 노력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어차피 못하잖아요. 담백한 친구 사이, 잘할 자신 있습니까?”
“와, 이렇게 갑자기 극딜을 넣는다고.”
“중요한 건, 아오코 군이 당신 고백을 거절한 본질적 이유가 있다는 뜻이죠.”
하쿠바가 카이토의 짜증을 우아하게 씹고 말한다. 본질적 이유라고? 그게 뭔데? 그냥 내가 단순한 소꿉친구일 뿐이니까 거절한 거 아냐? 방어기제가 고개를 든다. 그러나 더는 외면할 수 없는 부분. 카이토는 결국 직면하기로 한다.
하쿠바가 던진 의문이 점차 퍼져 커다란 파동을 일으킨다. 카이토는 파르페 컵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생각에 잠긴다. 천천히 3일 전 고백 당시를 떠올린다. 내가 고백했고, 아오코가 거절했지. 그리고 그때 분명 걸리던 부분이 있었다. 아 뭐였지.
-아오코도 카이토를 좋아해.
아, 그래 이거다. 아오코는 내가 싫다던가, 직접적으로 거절의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카이토가 단지 친구여서.’ 같은 이유도 아니다. 분명 그건 ‘좋아해’였다. 그리고 또 걸리는 점이 있었는데. 뭐였지? 오랜만에 당을 주입받은 뇌가 가속하며 활성화된다. 아주 작은 부분이어서 놓쳤던 거스러미, 그러니까-
“아오코 군은 순서를 지키고 싶다고 했어요.”
“순서…, 라고.”
-아오코는 아직 그 고백은 받아 줄 수 없어.
스치듯 들리는 목소리에서 유난히 이질적인 단어를 발견한다. ‘아직.’ 아오코는 분명 ‘아직’은 받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아오코가 ‘그때’ 내 고백을 거절한 이유는 뭘까? 뭘까, 알 것 같은데. 이어 떠오르는 것은 언젠가의 대화다.
/
그날도 둘이 함께 하교하던 중이었다. 부 활동 덕에 약간 늦게 나와서 그런지 하늘은 붉은 노을에 물들어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오코가 ‘아, 맞다’하고는 말을 꺼낸다. 있지,
“카이토는 애인이라던가 소중한 사람이 카이토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중요한 일을 비밀로 하고 말 안 하면 어떨 것 같아?”
“엥? 갑자기?”
“응, 갑자기.”
이유를 말해줄 것 같진 않네. 의문이 없는 건 아니지만, 카이토는 가만히 아오코의 물음에 답하기로 한다.
“으음, 솔직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상대가 알면 상처받을 수도 있으니까 숨길 지도 모르잖아? 배려의 일종인 거지.”
“그래?”
“응. 그럼 아오코 양은요? 어떨 것 같습니까?”
장난스럽게 순서를 토스한다. 그에 눈을 깜빡이던 아오코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답한다. 단단한 목소리가 들린다.
“음, 아오코는 슬플 것 같아. 연인 사이에서 비밀이라니, 신용이 없어 보이고. 그리고, 상대는 비밀을 아는 것보다는 숨겼다는 사실에 상처받을 수도 있잖아?”
“…그럼? 아오코는 그 소중한 사람이 비밀을 다 말해줘도 견딜 수 있어? 그게 너한테 잊히지 않는 상처가 될 수 있고, 그 상대를 영원히 용서하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네가 나를 말이야. 감히 붙이지 못한 말을 삼킨다. 바람이 불었다. 뒤로는 석양이 펼쳐져 있다. 하늘 아래로 배경은 흐릿해지며, 아오코의 얼굴만이 선명했다. 이상하게 입안이 바싹 마르기 시작한다.
아 괜히 물어본 걸까? 그치만, 나는, 너한테 역시 미움받고 싶지 않다. 그런 카이토를 아오코가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는다. 티 없이 맑은 웃음은 카이토가 경애하는 그것이다.
“그치만, 역시 아오코를 의지해줬으면 좋겠어. 외롭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아. 그래서 솔직하게 말해주면 좋을 것 같아. 용서는 그다음 순서잖아? 아오코는 먼저 듣고 싶어.”
“…….”
“그리고 그렇게 숨기다가 결국 들키면 서로한테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잖아. 신뢰가 깨진다던가. 아오코는 그게 너무 슬플 것 같아.”
아, 이건 면죄부일까? 카이토는 문득 아오코 뒤에서 밝게 빛나는 태양이 그의 후광처럼 보였다. 빙그레 웃는 모습에 언뜻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을 말았다. 너의 그 포용과 다정이 부디 나에게도 내려지길 바랐다. 간절하게.
그러나 너의 그 면죄가 나에게 내려질 날은 오지 않겠지. 자신은 범죄자였으며, 너에게 성가실 정도로 커다란 상처를 남긴 사람이다. 너를 감히 외롭게 만들었던 ‘나’인데. 내 이야기가 너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면 어떡해? 그래서 카이토는 자신의 비밀을 아오코에게 영원히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는 그렇게 체념했더랬다. 그의 현실은 그렇게 제게 관대하지 않았으므로. 바랄 수 없는 것은 일찍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단정하면서.
이후 회상을 마친 카이토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신음을 내뱉는다. 그러니까, 아오코는 자신을 붙잡고 끌어내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혼자서 비밀을 간직한 채로 끙끙 앓지 말고, 자신에게도 말해달라고. 아마도 이미 대충 눈치를 챈 상태에서 그런 걸 물어본 것이겠지. 이것은 힌트다. 나는 이미 너를 용서할 준비가 되었다는, 아, 이건 좀 비약일지도 몰라.
그러나 이것은 겁쟁이에게 내려진 분명한 유예. 다정한 선고자는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체념하지 말라고, 내가 있다고.
-아오코는 먼저 듣고 싶어.
고백을 거절한 이유는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아오코는 여전히 카이토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아.”
“깨달으셨나요?”
“어… 약간은.”
그것, 참 다행이군요. 젠틀하게 카이토를 기다려준 하쿠바는 품에 있는 회중시계를 꺼냈다. 5시 3분 45초, 이 정도면 세이프인가. 하쿠바는 오늘의 의뢰인을 떠올렸다. 눈앞에 있는 실연의 주인공에게 실연을 안겨준 당사자를.
/
“왜죠?”
“아 역시 조금 그렇겠지….”
“아뇨, 이유 말입니다. 이미 쿠로바 군의 고백을 거절한 것이 아닌가요?”
“음, 거절했다면 거절한 건데. 그렇다고 아오코가, 크흠, 카이토를 좋, 좋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카이토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아오코의 모습은 사랑에 빠진 소녀 그 자체였다. 그러니까 카이토를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건 역시 진실. 그렇다면, 왜.
“그럼, 왜 받아 주지 않은 건가요?”
그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뜬 아오코는 금방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어서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에는 다정함이 감돌고 있었다. 하쿠바 군, 아오코는 단순히 순서를 지키고 싶은 거야.
“아오코가 받고 싶은 첫 번째 고백은 그게 아니니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쿠로바 카이토는 나카모리 아오코에게 자신이 ‘괴도 키드’였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숨기는 중이었으니까. 비록 이 속이 깊고 다정한 아가씨는 눈치를 챈 이후에도 앞에서 티를 내지 않은 모양이지만.
‘순서라.’
아오코는 카이토에게 진짜 고백을 바라고 있다. 사랑이 아닌, 그가 홀로 감당해 온 아픔을. 추측을 끝낸 하쿠바는 그의 의뢰에 흔쾌히 응했다. 아카코와의 관계 진전에 힘써준 동료에게 이 정도 도움이야 당연히 해줄 수 있다. 아오코의 의뢰는 간단했다.
“아마도 아오코한테 차이고 우울해서 침대 밖으로 빠져나갈 생각도 없이 엎드려 있을걸? 그리고 최근 시계탑 근처에 있는 역에 새로운 디저트 가게 가 생겼대. 여기서 파는 초콜릿 파르페가 꽤 유명한 모양이야, 원래는 같이 가서 먹고 싶었는데…. 그래도 이 정도라면 카이토도 집 밖으로 나와 줄 것 같고.”
“그건 잘 모르겠네요. 제가 부른다고 나오는 사람은 아니라서.”
“음, 그래도 하쿠바 군이니까.”
“뭐, 알겠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끌어내죠. 아 맞다, 제가 할 역할은 단순히 의문을 던지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응, 충분해. 으음, 카이토한테 전에 간접적으로 말해준 적 있어. 아오코는 비밀까지 다 듣고 싶다고.”
카이토는 기억력도 좋고 똑똑하니까, 분명 조금의 의문만 가지면 아오코가 거절한 이유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것은 어떤 깊은 심해를 닮은 신뢰였다. 상대가 반드시 그렇게 행동할 거라는 확신.
하쿠바는 카이토를 빤히 꿰뚫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백기를 들었다. 자신을 포함한 쿠도 군이나 핫토리 군들은 괴도 키드를 잡기 위해 꽤나 많이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런 괴도 키드를 잡기 위해 쌓은 지식 따위는 이 사람 앞에서는 무용일 것이다. 쿠로바 카이토에 대해서 나카모리 아오코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를 증명하듯 제 앞에 앉아 있는 카이토는 혼란스럽지만, 답을 찾은 듯 보였다. 이제 마지막인가. 아오코는 오늘 아카코와 함께 시내에 놀러 간다고 했다. 주변에서 시내까지 이동할 만한 경로라면 이 근방에 있는 역을 이용하는 방법뿐이다. 예상 도착 시간은 5시, 아마도 아오코라면 이미 도착해 기다리고 있을 테다. 5시 6분 58초, 이 정도면 정리가 되었겠지.
“오늘 아오코 군은 아카코 양과 함께 시내로 놀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5시 즈음에는 이곳에 도착한다고 하더라고요.”
“5시?!”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카이토가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런 카이토와 상반되게 여유롭게 밀크티를 삼킨 하쿠바가 이어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전해달라고 했어요. 네가 지켜준 곳-”
덜컹거리는 소리가 크게 났고, 이어서는 종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유리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에서 기다릴게,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가버렸네요.”
어쩐지 후련해진 하쿠바는 제 오랜 숙적의 사랑을 응원하며 남은 밀크티를 말끔하게 비워냈다. 창밖의 날씨는 그야말로 쾌청하다.
/
자신이 ‘지켜준 곳’이란 무엇을 뜻할까? 카페를 나와 카이토는 뛰기 시작한다. 자신은 대단한 히어로도, 영화 주인공 따위도 아니라 무언가를 지켰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괴도 키드는 다르다. 괴도 키드의 목적은 늘 한결같았다. 빅주얼. 판도라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나날.
그랬던 괴도 키드가 빅주얼이 아닌 것을 훔친 적이 있었다.
‘아니, 지키려고 했지.’
너를 만났던 그곳,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그 장소를 말이야. 너와의 첫 만남이 시작된 그곳이 지저분한 이해관계에 훼손되지 않도록. 역 근처에 있는 시계탑 공원으로 빠르게 달려간 카이토는 어렸던 그때처럼 눈을 굴린다. 사실 찾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어. 네가 있는 세상에는 너만이 오롯이 선명하니까.
카이토는 천천히 시계탑 아래로 다가간다. 그 아래 계단에서 앉아 있는 여인은 그때처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나카모리 아오코는 계속 쿠로바 카이토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걸음에 고개를 든 여자가 웃는다. 그 어린 날과 다를 것 없이, 아주 예쁘게.
“안녕, 카이토. 그래도 아주 늦진 않았네. 역시 똑똑하다니까.”
“…아오코. 너, 언제부터.”
주어는 없지만 둘 다 그 대상을 알고 있다.
“그냥, 언젠가, 문득? 솔직히 납득하기 어렵지? 아오코도 그래. 그치만 정말로 그래.”
깨달음은 맑은 날에 예고 없이 찾아오는 소나기를 닮았다. 어느 날 아오코는 문득, 정말로 카이토가 괴도 키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다 알 것 같고, 변함없이 가까운 사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소꿉친구가 점차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비밀이 많아지는 소꿉친구, 그와 동시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괴도 키드. 줄어드는 연락 빈도, 그 순간마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괴도 키드로 시끄럽던 TV. 그 간극은 오묘할 정도로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검사인 어머니를 닮은 똑똑한 머리는 금방 과정과 결론을 내놓는다. 모든 수사의 시작은 ‘설마’라는 의심에서 시작하므로. 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빠가 혹시 모른다고 했을 때도, 커다란 흰 방에 갇혀 키드와 함께였던 관음상 사건 때에도 아니라 단언했는데. 똑 닮은 얼굴을 보고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묻어둔 의심은 크기를 점차 부풀려 확신으로 변모한다. 그냥 문득, 어느 순간 갑자기. 아오코는 그렇게 카이토의 다른 모습을 은연중에 눈치챈다. 그래도 믿기 싫어 모르는 체했다. 스스로의 결론을 그렇게 외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오코는 마침내 카이토의 집 지하에 있는 비밀 공간을 마주한다. 괴도 키드의 흔적이 가득한 그곳을.
갑작스레 커다란 비밀을 마주한 아오코는 황급히 도망쳐 제 방으로 숨었다. 그동안의 의심이 확신에서 진실이 되는 순간. 아오코는 혼란을 가다듬고 생각한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지?
자신이 아는 카이토는 재미 삼아, 흥미 따위 같은 이유로 범죄 따위를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니까. 결코 그런 기만적인 이유로, 자신을 홀로 두려는 사람이 아니니까. 아오코는 어린 날 제게로 다가와 푸른 장미를 건네준 소년의 미소를 기억한다. 알고 싶어. 마음의 진심이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 애가 홀로 감당했을 이유를 알고 싶다고.
나카모리 아오코는 역시 여전히 괴도 키드가 싫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쿠로바 카이토를 사랑한다. 아오코는 결국 카이토에게 유예를 허락한다. 모든 것은 카이토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에 결정될 것이다.
“그래도 작년에는 일이 끝난 것 같길래,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아, 아오코.”
“그때는 카이토가 아오코하고 시간을 많이 보내줬잖아?”
2학년 때의 공백을 메우려는 듯, 카이토는 필사적으로 굴었더랬다. 아오코가 외로워하지 않도록, 그렇게 열성적으로.
“아….”
무의식의 말로가 이렇다. 카이토는 딱히 의식적으로 그렇게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아오코 네 옆에 있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그것은 보상 심리에 가까웠다. 그게 이런 의심에 확신을 줬는지는 몰랐지만. 하지만 쿠로바 카이토는 안다. 아오코는 알면서도 묻지 않았던 거다.
자신이 매번 말괄량이에, 고집쟁이고, 어린애 같다고 놀리던 말과 다르게 아오코는 사려 깊고, 다정했으며 어른스러우니까. 그 어린 날에도 바쁜 제 부모님을 이해하려던 아이였음을, 카이토는 안다.
그래도, 말해도 될까? 정말 괜찮을까?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도망갈 수는 없다. 자신에게는 엉킨 순리를 풀 책임이 있으니까. 생각을 정리하며 표정을 이상하게 구겼다가, 폈다가, 찡그렸다가 고민하던 카이토는 한숨을 푹 쉬며 아오코의 옆에 털썩, 앉았다.
아오코가 자신을 용서했으면 좋겠으면서도 용서하지 않았으면 하는 상반된 감정이 대립한다. 전자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느끼는 소망이며, 후자는 포기와 체념을 닮았다. 옆의 기척을 느낀 아오코는 묻는다.
“그래서, 아오코한테 하고 싶은 말은 없어?”
“있다고, 말한다니까….”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나온다. 하여튼 고집쟁이. 카이토의 불퉁한 얼굴을 아오코는 가만히 바라본다.
“조금 길지도 몰라.”
“괜찮아, 시간은 많은걸.”
“지루할 수도 있는데?”
“카이토가 해준 이야기는 지루했던 적 없어.”
“나한테 실망할지도 몰라.”
“그건 카이토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에 결정할 아오코의 몫이잖아?”
단호한 어투와 눈빛에 결국 마음속 대립은 끝이 난다. 카이토의 세계에서 언제나 승리자는 눈앞에 있는 아가씨였으므로. 아오코가 보여준 것은 포용이다. 내가 다 받아줄 거라고 말하는 눈빛에 어느 누가 거부할 수 있겠어? 날고 기어도 카이토는 아오코를 이길 수 없다. 아 알았어, 말해줄게. 이제부터 판단은 제 몫이 아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된다. 외로운 한 소년과 괴도 키드의 회고록이.
그 이야기에서 카이토는 위태로웠으며, 외로웠고, 홀로 견디며 무너질 듯하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올곧게 진실을 위해 혼자 싸워나가는 뒷모습이 그려진다. 종내에 괴도 키드가 아주 멋지게 조직을 궤멸시켰다고 뿌듯하게 말하는 카이토는 밝게 웃었다가, 얼굴을 구기기 시작했다. 눈앞이 점점 흐려진다. 뺨 위로 흐르는 감각은, 아.
‘나 우네.’
감정의 둑이 깨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와르르, 스러진다. 터진 눈물은 흐느낌이 되었다. 그것의 이름은 외로움과 설움이다. 홀로 간직해온 커다란 비밀이 그렇게 호소하고 있었다. 아오코는 긴 이야기를 마친 제 소꿉친구를 끌어당겨 안는다. 고마워, 말해줘서. 커다란 해방감이 찾아온다.
아, 나는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겠구나.
카이토는 다정한 품속에서 기적처럼 확신을 얻는다. 불가능이 기적으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자신이 건넨 최초의 고백 속 푸른 장미처럼. 고백했던 그날, 하늘을 가득 채워 내렸던 꽃비처럼 그의 품을 덮은 바다가 내린 면죄부가 그를 용서했으므로.
/
“다 우셨습니까? 아오코 양?”
“응, 그러는 바카이토도 다 울었어?”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서로를 쳐다본 둘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 카이토 못생겼어! 뭐라고? 야 울었는데도 이 정도면 굉장한 미남이거든? 작은 실랑이가 오간다. 그동안의 평소처럼. 카이토는 어쩐지 후련한 기분으로 상쾌한 공기를 들이켠다.
그보다 왜 나보다 더 우는 거냐고 이 아가씨는. 아오코가 우는 모습은 죽어도 싫은 카이토는 아직 젖어있는 아오코의 뺨 위로 손을 댔다. 물기가 카이토의 손으로 옮겨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아, 근데 이거-
‘너무 가까운 거 아닌가?’
라는 생각과 동시에 아오코의 뺨이 매우 보드랍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손끝의 촉각으로 전해진 신경이 뇌로 빠르게 전달된다. 아, 아, 이게. 그-. 평소처럼 장난치거나 능글거리며 넘어갈 수가 없다. 몸이 딱딱하게 굳는다. 의식하지 않았던 거리감이 상당히 가깝다. 정신없이 굴러다니던 카이토의 눈동자가 한 지점에서 멈춘다.
“어라, 아오코 너 귀가-”
“꺅! 바카이토 눈 감아!!”
철썩, 때리듯 카이토의 눈을 양손으로 가린 아오코가 상기된 제 얼굴을 식히려는 듯 고개를 휘둘렀다. 가려진 시야에도 불구하고 카이토는 방금 본 것을 다시 떠올린다. 아오코의 귀가 발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소망에 확신이 더해진다. 지금이야, 최적의 타이밍이라고. 확신이 그렇게 속삭인다.
카이토의 손이 아오코의 손을 잡고 끌어내렸다. 카이토의 시선은 아오코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아직은 제대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
“…아오코.”
“…왜.”
“틱틱거리지 말고 나를 좀 보라구, 이 아가씨야.”
“제대로 보고 있거든?”
퉁명스럽게 웅얼이는 말투까지 사랑스럽다. 너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그랬다. 하나하나가 모두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빛이 난다. 저 하늘 아래서 반짝이는 바다처럼. 어두운 밤을 홀로 밝게 비추는 푸르른 달처럼, 그렇게.
그런 너를 사랑하지 않는 법을, 나는 몰라. 그러므로 이것은 세상이 뒤집히거나 무너져도, 변하지 않을 운명이며 진리다.
슬쩍 시선을 올리자 보이는 부끄러워하는 소꿉친구의 모습이 귀여워 카이토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역시 이제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고 싶었다.
“…난 역시 아오코랑 소꿉친구는 하기 싫어. 물론, 내가 너를 외롭게 했고, 상처를 줬던 사람이지만. 아오코, 네가 그랬잖아. 솔직하게 말해주면 용서해 주겠다고. 그러니까-”
이건 응석이야. 의지하고 싶다는 어리광이다. 네가 나를 용서했으니, 이 정도는 감당해달라는 매달림. 네 앞에서만큼은 정말 ‘아이’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치만 아오코, 네가 허락했잖아.
“앞으로는 어떤 비밀도 없을 거라고 맹세해. 나한테 한 번만 다시 고백할 기회를 줄래?”
작은 손끝에 머물렀던 시선이 올라와 푸른 바다를 마주한다.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의 모습에는 설렘이 가득하다. 어긋나고 엉켰던 순리가 드디어 올바른 위치에서 흐르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번이야말로 완벽한 시나리오 속 완벽한 고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카모리 아오코씨, 저 쿠로바 카이토와 정식으로 교제 해주지 않겠습니까?”
떨림으로 가득하고 진지한 목소리에 집중하던 아오코가 잡힌 손을 꺼냈다. 그 후 자신을 향해 열렬한 사랑을 약속하는 이에게 온 힘을 다해 안기며 동시에 말한다.
“물론이지!”
제게 안긴 작은 품을 꽉 껴안으면서 카이토는 밝게 웃었다. 데엥-, 데엥-. 시계탑의 종소리가 그들을 축복하듯 울린다.
완벽한 해피엔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