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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ful Escape - Soft Piano in Light Rain

​대륙사면

플로지

  그날 여름, 예보 없던 비가 왔다.

 

  뺨에 떨어진 빗방울 하나가 차갑다. 카이토는 그것을 손등으로 훔쳤다. 아니겠지, 부정하는 사이 정수리에 또 하나의 빗방울이 떨어진다. 원망스럽게 고개를 들어 바라본 여름 하늘은 늦은 오후치고도 흐리고 우중충했다. 착잡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남모를 한숨이 나온다. 하교하는 가방이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졌다.

 

  비 오려나. 손으로 이마 위 작은 지붕을 만든 아오코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제발, 우산 없는데. 중얼거린 말은 차마 끝나기도 전에 씨가 됐다. 짧은 예고를 끝낸 먹구름이 동남아의 스콜 같은 장대비를 퍼붓는다. 곳곳에서 에코다 고등학교의 하교하던 학생들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비명은 이내 거세진 빗소리의 밑으로 삼켜졌다.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을 가리지 않고 도로에는 빠르게 물이 고였다.

 

  일기예보 바보 멍청이, 저주하던 아오코는 마침 발견한 육교를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카이토가 빠르게 따라 들어왔다. 순식간에 눅눅해진 양말과 운동화를 신고 그들은 말없이 서 있었다. 비가 철제 육교를 때리는 소리는 깡통처럼 시끄럽다. 아오코는 짧게나마 뛰느라 목 위로 올라간 하복 상의를 내려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새 조금 젖어 든 반소매가 반투명해졌다.

 

  그들이 함께 하교하다 비를 맞은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변화무쌍해지는 날씨를 따라 중학생 시절에도 한번 그랬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들은 문구점의 처마 밑에서 소나기가 그치기를 기다리다 끝내 비에 몸을 맡기고 걸었다. 카이토는 ‘드라마처럼 내가 옷이라도 벗어서 같이 뛰어야 되나?’ 물었고 아오코는 쿡쿡 웃으며 됐다고 말했다.

 

  아오코는 그리 나쁘진 않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카이토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날과 다르게 카이토는 어쩐 일인지 멍하니 육교의 바깥을 응시하고 있다. 이 육교는 하굣길 옆에 흐르는 작은 개울을 건넌다. 주민들의 좋은 산책로이자 휴식처인 이곳에서 제 아버지인 나카모리 긴조도 이따금 와서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다만 오늘의 개울은 물살이 아주 거세다. 소나기를 먹어가며 불어난 유속이 높은 수위로 흘렀다. 모두가 피신하기 바쁜 지금, 개울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은 없다.

 

 

  “무슨 생각해?”

  카이토는 그제서야 아오코를 한번 바라봤다가 멋쩍게 시선을 거뒀다.

  “망했다, 는 생각.”

  “망하긴 했지.”

  “네가 우산을 들고 다닐 리가 없으니까…….”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아니, 들고 올까 고민은 했었거든. 네가? 응. 건성인지 진심인지 모를 대답을 하며 카이토는 육교 밖으로 손을 뻗었다. 2초 만에 손이 흠뻑 젖은 채로 돌아왔다. 수명을 가늠하는 학자처럼 카이토는 젖은 제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괜찮을까. 모르겠다. 육교를 지붕 삼아 시간을 죽여본다.

 

 

  “예전에도 이런 적 있었잖아.”

  아오코가 말했다. 카이토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네가 했던 말 기억나? 지금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어. 아오코가 웃으면서 말하길래 카이토는 흐릿했던 그날의 기억을 되짚었다. 아, 그거? 지금은 안 되겠다. 벗어주기 마땅한 옷이 없네. 가쿠란에 비해 하복 셔츠는 면적이 작고 힘이 없다. 그에 피식 웃은 아오코의 대답은 여전히 같았다. 설령 가능하더라도 됐다는 말을 웃으면서 했다. 어차피 카이토는 절대로 하복 셔츠를 벗을 생각이 없었다. 안에 입은 하늘색 반팔 내의가 있을지라도 오늘 그에게는 여유가 없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춥지도 않은데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이미 반쯤 젖은 상의가 그렇게 불편하고 아렸다. 카이토는 그치지 않는 소나기를 가늠했다. 요즘 소나기는 소나기가 아니야, 내리는 수량도 지속 시간도 랜덤 박스지. 어디선가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카이토는 자신이 복불복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짧게 몰아치는 비의 시점은 이미 지났다.

  “뛰어가자.”

  “이 거리를?”

  아오코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이 그놈의 소꿉친구는 말릴 새도 없이 빗속으로 들어갔다. 다섯 걸음 나아가서 멈춰선 그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서! 어차피 젖을 거잖아 - 그러니까 더더욱 뛸 필요 없잖아, 아오코의 푸념을 듣기엔 그가 일방적으로 뛰어간 거리가 멀었다. 온몸을 빗속에 내던진 카이토가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하는 수 없겠지, 가볍게 한 움큼의 공기를 마신 아오코는 가방을 머리 위에 받치고 카이토를 향해 뛰었다. 가방은 처마 노릇을 일도 못 한다. 순식간에 젖어 든 머리카락을 들썩이며 아오코는 카이토의 뒤를 서둘러 따라갔다. 남은 하굣길은 길었고 뜀박질은 오래가지 못했다.

 

  “카이토!”

  아오코가 힘껏 외쳤다. 카이토가 가볍게 뛰던 것을 멈췄다. 그만, 나 힘들어. 장대비 속에 있으니 겨우 뜬 눈 사이로 숨이 더 안 쉬어지는 것 같다. 아오코가 허리를 숙여 무릎을 잡고 차오른 숨을 뱉을 때, 멀리의 카이토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게 평소에 운동을 좀 하라니까.”

  “내가 왜 뛰어야 되는데……?”

  숨을 고르는 아오코를 카이토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래도 빨리 가면 좋잖아? 아오코가 곁눈질로 카이토를 노려봤다. 바카이토, 누구나 너처럼 잘 뛰는 건 아니야. 말하면서도 억울했다. 나카모리 아오코는 살면서 쿠로바 카이토보다 잘 뛰는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재수 없는 그 인간은 팽하게 코웃음을 치면서도 가만히 아오코를 기다렸다. 어쩌면 비웃으며 잠시 돌렸던 고개에는 인상을 썼던 것도 같다. 물에 홀딱 젖은 생쥐 꼴이 된 두 사람이 눈을 마주 보았다. 얼굴에 해초처럼 엉겨 붙은 머리카락이 바보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카이토는 엉망이 되어 들러붙은 아오코의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얼른 가자.

 

  걸어가는 길에 수없이 많은 수증기를 마셨다. 도란도란 빗속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학교 숙제도 다 젖었겠지…. 그럼 안 해도 되겠네? 카이토의 말에 아오코가 싱긋 웃었다. 그러게, 합법이네 이건. 줄어든 할 일에 아오코의 기분이 반짝 좋아졌다 말았다. 문득 까먹고 있던 것을 기억해낸 손이 성급하게 가방 포켓을 뒤졌다. 가만 보니 여기 어디쯤 돈을 넣어놨었는데, 손끝에 닿은 것을 움켜쥐어 꺼내자 젖은 지폐와 동전 몇 개가 딸려 나왔다.

  “아, 망했네….”

  지퍼 없는 포켓에 숨어 있던 1,000엔권 지폐는 행주처럼 쥐어짜고 싶을 정도로 흠뻑 젖었다. 이미 끝부분이 찢어지기 시작한 지폐를 카이토가 살피며 말했다.

  “잘 말리면 돼.”

  “그러다 찢어지면 못 쓰잖아.”

  “내가 말려줄게.”

  “자신 있어?”

  “나 못 믿어?”

  당연히 못 믿지, 대답하는 아오코의 손이 카이토에게 지폐를 넘겼다. 카이토의 손재주 하나는 믿지 않을 수가 없다. 받은 돈을 제 주머니에 접어 넣은 카이토와 아오코는 계속 걸었다. 아오코가 제 손에 남은 동전들의 액수를 계산하고 물었다.

  “뭐 사 먹을래?”

  250엔이니까,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초콜릿 하나는 사줄게. 카이토는 망설이다 답했다.

  “봐서.”

  석연찮은 어투가 신경 쓰인다. 그 대답은 뭐야, 아오코가 볼멘소리를 하며 가방 포켓에 다시 동전을 넣었다. 평소 같으면 냉큼 좋다고 할 인간이 썩 기뻐 보이지 않았다. 갈 길을 응시하는 카이토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물먹은 옷가지가 몸을 중력 방향으로 늘인다. 하복의 상의는 모두 흰색이었고 그들은 몸에 들러붙는 모든 옷자락을 끝내 포기했다.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의 형상은 언젠가 다시 앞뒤로 바뀌었다. 아오코는 카이토의 빠른 걸음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서둘러 집에 가려는 이유가 뭐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포기하면 편했다. 중학생 때도 겪어서 알았다, 그들은 여름이 원래 이런 것이니라 생각하며 비에 적셔지는 오감을 방치할 줄 안다. 나카모리 아오코가 그랬듯 쿠로바 카이토도 분명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아오코는 제 팔을 포갰다. 그때는 그의 몸이 밀착해서인지 단지 어려서인지 춥지 않았는데, 오늘은 눅눅한 늦여름 날씨에도 점점 몸이 으슬으슬해진다. 상가의 편의점 앞을 지날 때 아오코는 카이토를 부르려다 말았다. 카이토는 일말의 시선도 없이 편의점 앞을 매정하게 걸었다. 사주려던 초콜릿은 지금 상황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깐, 이라 외치려고 황망히 벌렸던 그녀의 입 안에 기분 나쁜 빗방울이 맥없이 묻었다.

  물속을 걸어가는 것 같다. 젖은 입술조차 무거워져 말을 나누기가 귀찮아졌다. 카이토는 계속 앞장서서 묵묵히 걸었다. 매사 든든하던 어깨가 어쩐지 무거워 보인다. 반소매에서 나온 왼팔에 이유 모를 힘줄이 돋아 있고, 그 밑에선 왼손가락들이 서로 얽히듯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빗속에 파묻혀 그 등을 바라보던 아오코의 눈동자가 일순 일그러졌다. 젖은 흰 셔츠에 붉은색이 잉크처럼 스며든다. 가로로 새어 나온 짧고 붉은 실선은 순식간에 위아래로 잔가지를 낸다.

  “피가…….”

 

  빗소리에 묻혀서 들리지 않았을까. 아오코는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빗물이 씻어내지 못하는 핏빛 흔적에 마음이 초조해진다. 팔 하나의 거리보다 더 빠른 걸음걸이로 멀어진 카이토에게, 최선을 다해 목소리를 냈다.

  “카이토! 너 등…, 왜 그래?”

  그제서야 그는 뒤를 돌아봤다. 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을 가진 이가 되묻는 말이 잘못됐다. 아오코는 멈춰선 카이토의 등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뜨거운 체온이 셔츠 전체로 올라온다. 여름이 아무리 후덥지근해도 그보다는 사람이 더 뜨겁다.

  “괜찮아? 안 아파…?”

  “뭐가?”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무렇지 않으면 안 되는 거잖아. 괜찮으면 안 되는 거잖아. 아오코의 일그러진 눈가가 제자리서 떨렸다. 태평한 척하는 장본인의 얼굴은 믿으면 안 된다. 아오코는 급하게 카이토의 손목을 잡고 끌었다. 빨리 너희 집으로 가자. 그의 마음에는 언제나 한발 늦게 닿을 수 있다. 장대비 아래에서 걸었던 시간들이 바늘처럼 아프게 느껴졌다. 이제라도 그녀는 서두르고 싶었다.

 

  뭔진 몰라도 별거 아니라니까, 말하면서 쿠로바 카이토는 함께 걸음을 서둘렀다. 아오코가 잡은 그의 손목이 순순히 빠른 속도를 따르다가 조금씩 뒤처졌다. 괜찮아? 물으며 그녀는 손목에서 손을 내려 꽉 쥔 그의 주먹을 괜히 어루만져 봤다. 손가락이 얽어지자 잔뜩 힘을 주던 그의 손이 풀어졌다. 아픈 거, 참고 있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문득 쳐다본 카이토의 얼굴에는 늘 그렇듯 해답이 없다. 그의 얼굴은 비를 맞아 이마에 들러붙은 곱슬머리 때문인지, 빗방울이 매달린 눈꺼풀 때문인지 그저 우산이 없어 겪는 불행에 불과하게 느껴졌다. 원망스러웠다.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런 일이 너에게 벌어진 걸까. 아프다면 아프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걸까. 얼굴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 중 몇 개에는 눈물이 섞여 있다. 우산도 없이 잡아끌기만 하는 게 한없이 무력해서 그녀는 남모르게 훌쩍였다. 빠른 걸음이 밟는 물웅덩이마다 이는 물보라가 무릎까지 튀었다. 끝내 발 빠르게 도착한 카이토의 집 앞에서 그가 도어록을 누를 때까지도 아오코는 잘못한 사람처럼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문이 열리고 대문을 들어서는 카이토의 뒤를 그녀는 따라 들어갔다.

  “왜 따라 들어와?”

  악의 없는 물음이 너무 아팠다. 아오코는 마당에서 비 맞고 있는 그를 현관문으로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

  

  “너 안색 안 좋아, 알아?”

  “…… 난 괜찮,”

  “안 괜찮아.”

 

 

  집 안에 들어가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는 채로 실랑이가 계속됐다. 다친 데 봐줄게. 네가 왜 봐 - 카이토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성인 친구에게 몸을 어떻게 보여주겠냐는 맥락이었을 것이다. 별거 아니라고 했잖아. 어떻게 그게 별 게 아니야…! 아오코가 크게 신경질을 낸 순간 정적이 흘렀다. 홧김에 높이고 만 목소리에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네 잘못이 아닌데 자꾸 화가 났다.

  밖에서 천둥이 한번 치자 카이토는 몸을 움찔 떨었다. 젖은 상처는 점점 통제를 벗어난다. 그는 난감하다는 듯 바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곱슬머리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식은땀처럼 흘렀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을까. 서 있기가 힘들었다. 등과 복부와 다리가 아렸다. 온몸이 심해에 푹 잠기고 쏟아져 내린 비가 핏줄마다 흐르는 것 같았다. 그는 물을 잔뜩 떨어뜨린 마룻바닥을 신경 쓰지 않고 소파로 걸어갔다. 처치는 언제 하지, 귀찮았다, 일단은 등을 기대고 웅크려 앉는다.

  등을 켜는 걸 잊어서 집 안은 어두웠다. 먹구름을 담은 통창에서 들어오는 빛에는 이유 모를 누리끼리함이 섞여 있다. 아오코는 찝찝한 음영 속에 파묻힌 카이토를 바라보다 마룻바닥을 내려봤다. 카이토가 걸어간 흔적과 제가 서 있는 곳이 물바다가 되어 있다. 그와 그녀는 넘볼 수 없는 수심으로 침전하고 있다. 나는 이 집에 실례만 끼치고 있구나. 카이토가 앉은 채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어디까지 신경을 안 써야 해. 아오코는 제 치맛자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을 비참하게 쳐다보았다. 조용한 그때 가방에 넣어둔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아오코는 버클을 열고 축축한 종이들 사이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표면에 어린 물방울을 쓸어내자 화면에 뜬 건 ‘아빠’, 나카모리 긴조였다. 그녀는 카이토 쪽을 한번 일별한 뒤 전화를 받았다.

  아오코, 갑자기 비가 오는데 집에는 잘 갔니. 카이토의 집도 집이므로 그녀는 대답했다. 네…. 통화의 전반적인 내용은 안부 확인으로 시작해서 일방적인 통보로 끝났다. 오늘 많이 늦을 것 같다, 카이토와 둘이 알아서 저녁 잘 먹거라. 통화를 끊은 아오코는 가슴팍이 오르내리도록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웅크리고 앉은 카이토와 눈이 마주쳤다. 네, 로만 이루어진 통화로도 카이토는 넌지시 물었다.

  “경부님이야?”

  직군으로 부르는 말에 아버지를 부르는 듯한 리앙스가 담긴다. 아오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늦는대.”

  “왜?”

  “얼마 전에 병가를 냈었는데,”

  카이토는 아오코의 말을 들으며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병가 낸 그 며칠 사이에 일이 많이 밀렸대, 경찰이란 이래서 참…. 아오코의 아버지는 경부가 되어서도 드물지만 부상을 입었다. 카이토는 뿌연 머릿속으로 나카모리 경부님의 건강을 가늠해봤다.

 

 

  “많이 다치셨어?”

  “예전만큼은 아니야.”

  “……”

  “그때랑은 비교도 안 되긴 해, 그래도…….”

  아오코가 말하는 그때를 카이토도 잘 알고 있었다. 홋카이도에서 벌어졌던 비극은 괴도 키드로서도 쿠로바 카이토로서도 반복하기 싫었다. 나카모리 긴조의 병문안을 가기 전후의 며칠 동안 카이토는 죄의식 하나로 잠을 설쳤다. 눈앞에서 총을 맞아 죽어가는 나카모리 경부를 영원히 되새겼다. 다시는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노라, 덕분에 경부의 이번 부상은 찰과상과 인대 손상이 전부였다. 다행이네, 카이토는 중얼거렸다.

  “다행이지. 이번에는 괴도키드가 아빠 바로 앞에 나섰다고 들었거든.”

  아오코도 그 사연을 얼핏 들어 알고 있을까. 오늘 그녀의 앞에서 아파해서는 안 된다, 젖어 있는 입술이 비쩍 말라 들어갔다. 카이토는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놀라워하며 말했다.

  “거봐,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니까.”

  “그 인간이 그럴 리 없어.”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를 상처 입히는 괴도 키드가 좋은 사람일 리 없다.

 

 

  “애초에 키드가 있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난 인정할 수 없어. 아오코의 추측에는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카이토는 마른세수를 하고 눈가에 손을 올렸다. 애초에 괴도 키드가 적을 끌어들였기에, 수사 2과의 나카모리 경부가 당한 것이다. 그는 이 가족의 원흉이었다. 아오코는 문득 떠오른 말을 뱉었다.

  “근데 키드가 더 많이 다쳤대.”

  아빠도 아직 의아해하셔, 자기를 대신해서 다쳤대. 카이토는 눈을 가린 손바닥 밑에서 두 눈을 감았다. 속죄할 거리가 너무도 많아서 그런 걸로 될지 모르겠다. 지끈거리는 머리가 다시금 느꼈다,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 셔츠야 그렇다 치지만 교복 바지가 검은색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눈을 다시 마주쳤을 땐 아오코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닿고 있었다. 그녀는 한쪽 구석에 젖은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하…. 미안, 방해 안 되게 가주려 했는데….”

  너를 생각해서 그냥 가버리려 했는데. 사실 서러워서라도 가버리려 했었다.

  “밥 우리 둘이 먹어야 한다니까, 그냥 있어도 될까?”

 

 

  거절할 수 없다. 카이토는 미친 듯이 창을 때리는 비를 미워하며 말했다.

  “응. 좀 있다 배달시키자.”

  아오코는 알겠다는 듯 수어 번 공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의 고갯짓이 멎자 그동안 제자리서 꼼짝 않고 서 있었던 그녀가 드디어 움직였다. 배달? 물으며 아오코는 카이토에게로 다가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카이토의 주변에 있는 소파 원단이 젖어 들어가 있다. 방수를 뚫고 물웅덩이처럼 변해버린 브리즈 색 천을 보고 카이토의 등 뒤 붉은색을 떠올린다. 웅덩이 한가운데 파묻힌 카이토는 평온하게 물었다.

  “배달 별로야?”

  “그게 아니라, 그냥…. 집이 엉망이 돼서.”

  “신경 쓰지 말랬잖아.”

  아오코는 그를 무시하고 이미 어질러진 바닥으로 향했다. 그녀가 뒤를 돌아 죄스러운 치마를 젖은 수영복 짜듯 걷어 올려 짜낼 동안 카이토가 급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의 허벅지가 치마 사이에서 으슬으슬 떠는 것을 순간 보았다. 물기를 대충 털어 낸 아오코는 카이토 옆에 털썩 앉았다. 할 말이 많았는데, 그래서 길을 잃었다. 여름답지 않은 추위에 팔짱을 끼며 그녀는 떠오르는 아무 진심을 또박또박 읊었다.

  “난 내 주위가 아픈 게 싫어.”

  “그건 당연한 거야.”

  아오코가 카이토를 바라보았다. 웅크린 몸에 붙어 앉아 있자니 그가 미동도 없이 죽어가는 것 같아 무서워졌다.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내 주위 사람이니까, 그것도 가장 소중한…. 소중함을 고백하는 상상만 하는 입술이 멎었다. 아픔에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에 아오코는 체념해야 했다. 젖은 머리카락이 얼추 마른 뺨에 처연하게 들러붙는다. 진작부터 추웠던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카이토가 아오코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너 춥지.”

  “…… 이런 거야말로 별거 아닌 거야.”

  “씻고 와.”

  아오코의 목이 메었다. 내가 배려를 받을 상황인가.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아, 옷도 필요하려나.”

  “……”

  “내 옷 빌리는 거 괜찮아?”

  물으며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빌리는 건 괜찮은데, 내가 알아서 할게. 아오코가 말렸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통 듣질 않았다. 그는 느린 걸음으로 다리를 저는 것 같기도 한 걸음으로 자기 방에 들어가서 나름 프리사이즈라고 할 법한 티셔츠와 바지를 꺼내 왔다. 미안, 이 정도가 최선이네. 옷을 건네는 찰나에 카이토는 숨을 눈에 띄도록 크게 쉬었다. 아오코는 그것을 차마 거부하지 못하고 건네받았다. 오랜 소꿉친구가 무슨 부탁을 하는지 그녀는 이해했다.

  

  “고마워.”

  네가 씻을 동안, 내 일을 알아서 처리할 시간을 줘. 아오코는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게 최선일지 생각했다. 그녀가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카이토는 다리를 절며 다시 제 방으로 향했다. 폭삭 젖은 몸은 폭탄 파편에 맞은 것처럼 무거웠다. 하복을 벗고 조심스레 내의까지 벗고 나니 옷에 스며든 피가 보인다. 어쩐지 등판이 유난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쓰라린다 했더니 상처가 터졌던 것 같다. 그는 트리돌 - 트라마돌염산염, 진통제 - 을 팔뚝에 주사하고 통증이 조금이나마 사그라들기를 멍하니 기다렸다. 방이 순간 번쩍 밝아졌다, 가까운 곳에 벼락이 떨어졌나 보다. 즉시 귓구멍을 시끄럽게 꿰뚫는 천둥이 쳤다.

  하필이면 비가 온 탓이다.

  이유 모르게 머리가 아팠다. 무수히 많은 비는 설움처럼 젖어 왔다. 장대비가 내릴 때면 안 좋은 일이 너무도 많았다. 나카모리 경부의 일도 그렇고 생판 남이었던 나이트메어 같은 범죄자들도 그렇다. 비는 심장을 채우고 목 끝까지 차오른다. 얼굴의 수분은 모두 말랐는데도 자꾸만 마른세수를 반복하게 됐다. 왜 이렇게 됐을까. 어쩌다 나카모리 아오코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됐을까.

  나카모리 경부를 대신해서 맞은 총격을 후회하진 않는다. 지금의 그가 총상의 아픔을 버텨내야 하는 것에도 불만은 없다. 카이토는 끊어질 듯한 정신을 잡기 위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거울로 향했다. 등의 상처를 다시 소독하고 깨끗하게 마른 붕대를 감았다. 스펀지처럼 물을 먹은 복부와 다리의 붕대를 떼어내고 다시금 상처 주위를 손봤다. 모든 과정은 속죄의 일부가 되고 싶다. 비도 씻어내지 못하는 잘못이 육중한 닻처럼 매달려 있다. 응급 처치를 대충 끝낸 카이토는 제 하복 셔츠를 싫증스레 구겨서 옷장 옆 구석으로 던졌다. 단지 카이토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아오코의 눈치가 두려웠다.

 

  거실 소파로 돌아간 카이토는 팔걸이 부분을 베게 삼아 드러누웠다. 머리가 축축하고 집안을 정리해야 하고 같은 것을 신경 쓸 상태가 못 되었다. 익사할 것 같은 온몸이 뜨거웠다. 무심결에 다리를 뒤척이자 총탄이 관통했던 종아리가 비명을 질렀다. 그 선명한 아픔조차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다. 깊은 안개 속으로 의식을 밀어 넣는 진통제에 그는 눈꺼풀을 겨우 끔뻑거리다가 감았다. 죽으려나, 설마 죽겠어. 시야가 깜깜해진 순간 의식의 퓨즈가 끊겼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아오코가 절실하게 그의 어깨와 뺨을 두드리고 있었다.

  “카, 카이토! 괜찮아?”

  눈을 뜨기는 했는데 시야가 뿌옇다. 카이토는 안간힘을 다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약물의 힘을 빌려도 온몸이 멀쩡해질 수는 없었다. 아오코의 얼굴과 목소리가 맹하게라도 와닿는 걸로 봐서 제가 아직 죽진 않은 것을 위안 삼았다. 카이토는 괜찮다고 안일하게 답하려 했다.

  “괜,”

  “카이토, 너 몸이 너무 뜨거워, 체온계 어딨어?”

  아오코가 다급하게 물으면서 카이토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손이 너무 시원하게 느껴진 만큼 카이토의 이마는 너무 뜨거웠다. 게슴츠레 뜨고 있던 카이토의 눈이 조금이나마 커졌다.

 

 

  “야, 잠깐…….”

  아오코의 접촉은 언제나 무감하고 갑작스럽다. 아픔은 익숙한데 이런 것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오코의 손을 떼어낼 힘이 없어서 그는 그것을 그대로 두었다. 불쑥 들어온 시야가 마음을 못되게 만들어 아픈 얼굴이 더 뜨거워진다. 나카모리 아오코는 아까 그가 꺼내 준 티셔츠를 입고 있지 않았다. 알려줄 수 있으면 알려줘, 체온계 어딨는지, 묻는 말에 카이토는 희미한 목소리로 바지나 입으라고 답했다. 아, 그건 커서 도무지 입을 수가 없었어…. 간당간당한 정신이 복합적으로 아찔해졌다.

 

  나카모리 아오코는 건네준 것보다 더 큰 박스티를 찾아 입어 다리를 조금 가리고 있었다. 희미한 의식은 그 와중에도 근원이 잘못된 걱정을 시작한다. 그것은 카이토의 방에 들어가 옷을 뒤져봤다는 뜻이었고, 결론적으로 카이토의 방을 뒤져봤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봐도 되는 것과 봐선 안 되는 것이 함께하는 곳. 그는 움직일 힘 없이 소파에 등을 기대고 느릿느릿 생각했다. 지금 저 동그란 눈으로 체온계나 찾고 있는 걸 보면 괜찮다고 생각해도 될까. 아니, 이미 눈치챌 정황은 넘쳤다. 모든 걸 알고도 배려해주는 걸지도 몰라. 와중에 낯설고 간지러운 감각은 그가 인내하는 고통보다 빠르게 포커페이스의 철판을 통과했다. 이마 온도를 체크하느라 얼굴을 가깝게 들이댄 아오코에게서는 제가 쓰는 샴푸의 향이 났다.

 

  카이토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한심한 생각이나 할 기력을 억지로 돌려본다. 그는 아오코의 손이 떨어진 제 이마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건성으로 답했다.

  “저기 서랍장, 중에 있었나….”

  “그래…? 아님 지금 응급실에라도 가자.”

  “뭔 응급실 같은 소리야….”

  아오코의 걱정스런 눈빛이 이내 분한 한숨으로 변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뱉고 거실 서랍장으로 향했다.

 

 

  “너 그러다 죽는다…?”

  카이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오코는 서랍장 첫 번째 칸을 살피며 덧붙였다.

  “사람은 생각보다도 쉽게 죽어,”

  죽으면 모든 게 끝이야. 쿠로바 카이토는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다만 느리게 검은 눈꺼풀을 깜박였다. 한번 움츠러든 미간은 잘 펴지지 않았다. 소파에 파묻히듯 기댄 상체를 움직일 힘이 없다. 필시 골병이 날 텐데 죽지는 않겠지, 신이 자신에게 준 신체가 그리 나약하지 않음을 믿고 있다. 그 순간 카이토는 의미 모를 말을 묻고 싶어졌다.

  “그러면…, 어떨 거 같은데?”

  서랍장 세 번째 칸을 뒤지던 아오코가 카이토에게 고개를 픽 돌렸다. 동그란 눈이 불안하게 커졌다.

 

 

  “왜 그런 소릴 해?”

  불안한 목소리에 불안한 물음표가 올라간다. 아오코는 카이토에게 느린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무릎을 구부려 걱정스레 눈높이를 맞춰본다. 겨우 실눈을 뜨고 눈을 마주친 카이토의 청안에는 힘이 없다. 다급하니 줄곧 상상하던 고백이 튀어 나갔다.

  “난 너 아니면 안 되는데…….”

  카이토의 가라앉은 눈가가 들썩였다. 힘겹게 반쯤 떴던 눈이 사 분의 삼 정도로 더 떠졌다. 카이토와 아오코는 선명히 눈을 맞췄다.

  “나도 그래.”

  “……”

  “내가 더…….”

  이렇게 고백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고통만큼의 내성이 사랑에는 없다. 의미를 깨달은 아오코의 눈이 커졌다. 커다란 눈동자 안의 기쁨과 슬픔이 잘 측량되지 않았다. 복잡하게 일그러진 눈썹과 입가, 그녀가 복잡한 표정으로 카이토의 두 뺨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목울대가 떨려왔다.

  “내가 뭘 해주면 될까…?”

  내가 뭘 해줄 수 있을까. 카이토는 그 순간 아오코의 말을 견딜 수 없어졌다. 사람은 생각보다도 쉽게 죽어, 죽으면 모든 게 끝이야. 그것은 비단 오늘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어둠 속 다시 큰 번개가 쳤다. 찰나 동안 아오코의 얼굴이 타오르듯 밝아졌다. 뒤이어 오는 천둥소리가 퍼질 동안 카이토는 멍청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온 세상이 젖고 있는데 나만 유난히 갈증이 나는 것이다.* 그것도 돌이킬 수 없이 멍청한 방식으로. 언젠가 아픔은 사그라들겠지만 기회는 죽고 말겠지. 목을 들어 조금만 뻗으면 아오코에게 닿을 것 같아서, 그는 고개를 뻗었다.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아무것도 하지 말아줘, 그가 고했다.

 

 

 

 

 

 

 

 

  *

  쏟아져 내리는 비가

  핏줄 마다 흐르고

  심장까지 채우고

  목차오르는 날이 있다

  온 세상이 푹 젖고 있는데

  왜 나만 유난히

  왜 갈증이 날까

  - 용혜원, 「비 오던 날」 中

 

 

 

  **

  대륙사면 :

  대륙붕 끝에서 심해로 이어지는 급경사면, 바다의 낭떠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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