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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의 파랑

수애린

  “그럼 결혼해.”

  “뭐?”

 

  눈앞의 소꿉친구…… 아니, 구 소꿉친구이며 연인 사이가 된 쿠로바 카이토의 폭탄 발언에 나카모리 아오코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단 하나, 벙찐 표정으로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것 뿐이었다.

 

🕒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SNS에서 인테리어와 시그니처 디저트로 입소문을 탄 카페와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한 아오코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모처럼 맛있는 초코 파르페가 있다고 하니 카이토와 함께 오려고 했었다는 것 같지만 현재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은 케이코였다. 아무리 그래도 데이트 장소로 쓰려고 했던 곳을…… 이라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약속 장소에 나와서 본 아오코의 얼굴을 떠올린 케이코는 그냥 조용히 어울려 주기로 결심했다. 그만큼 아오코는 ‘나 고민이 있어’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던 것이다.

  “결혼하자고 한 거지?”

  “그렇다니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오코, 아직 스무 살인데? 그야, 그야…… 언젠가 결혼한다면 당연히 카이토가 좋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잖아! 이어진 아오코의 열변에 케이코가 꽤나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게 되었구나…… 라는 감상을 가진 것은 비밀에 부쳐두기로 하자. 하긴, 두 사람이 언젠가 결혼 엔딩을 맞이할 거라는 것은 비단 케이코 뿐만이 아니라 쿠로바 카이토와 나카모리 아오코를 아는 에코다 고등학교의 졸업생 모두가 인정할 사실이었다. 오히려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조간신문 1면 기사 감이라고 말할 걸. 그런 두 사람이 드디어 사귄다는 게 들통났을 때 며칠간 얼마나 시끄러웠던가.

 

  “듣고 있는 거지?”

 

  그런 감상에 젖어있는 케이코를 바라보던 아오코가 반달눈을 떴다. 그럼, 그럼. 듣고 있지. 그렇게 어렵게 사귀게 된 것 치고는 아무래도 탄탄대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케이코는 제 앞에 놓인 카페라떼를 한입 마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카이토 군이 딱히 나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역시 내가 나쁜 거야?”

  “아니, 그것도 좀…… 딱히 아오코 잘못도 아니지 않니? 그냥 카이토 군이 아오코가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구나, 정도?”

  “말도 안 돼, 진짜…….”

 

  빙글빙글 웃는 케이코를 본 아오코는 맥없이 테이블에 엎드리고 말았다. 어디 가서 남사스러워서 하지도 못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고 하는데, 그저 웃는 절친한 친구가 야속하였다. 그렇다고 달리 털어놓을 사람도 없었기에 오늘의 지원군은 케이코 뿐이지만.

 

  “정말 카이토가 그렇게까지 나올 줄 몰랐단 말이야. 당연히 기다려 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건 나도 의외야. 그렇게까지 잘 참았던 애가 왜 갑자기 그렇게 급발진을 하지? 그 누구보다 아오코를 소중히 여기고 싶은 건 카이토 군일텐데.”

아오코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러고는 곧 큰 한숨과 함께 그날의 상황이 아오코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

  카이토는 아오코의 소꿉친구이자 첫 남자친구이다. 물론, 카이토 역시 아오코가 첫 여자친구이고-그렇게 예쁜 여자를 좋아하면서 어째서 여자친구는 없었는지 의문을 가졌다가 엄청 삐지게 만들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자연히 둘이서 처음 하는 것들이 늘어갔다. 그저 소꿉친구일 적과 비교하면 크게 달라진 생활은 아니었지만, 역시 연인이라는 무게와 분위기가 종종 느껴지는 때가 있었다. 어쩐지 솔직함이 늘어난 카이토의 언동이 그랬고, 자연스레 연인 할인을 받아 영화를 볼 때가 그랬다. 그리고 또 한가지.

 

  “자, 잠깐!”

 

  스킨십이다.

 

  아오코도 바보가 아니고 어린애도 아니다. 언젠가 카이토와 그런…… 단계, 어른의 계단, 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을 할 때가 올 것이라는 생각은 막연하게 했지만, 설마 이 바보 카이토가 이렇게까지 참을성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매일같이 속옷 색을 확인하는 둥 변태적 행각은 일삼아 왔지만 그래도!

 

  “아―, 미안, 미안. 무심코.”

 

  그런데 우리, 연인이지?

 

  처음에는 아오코의 진도에 맞춰주던 카이토도, 요즘에는 어쩐지 조급해 보이는 때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엄한 곳으로 올라가고 내려가려는 손을 때려 멈추면 이런 말들을 하면서 비죽 웃는 것이었다.

 

  “동의 없는 스킨십은 범죄인데요, 월하의 마술사 님?”

  “헤에. 동의한 게 아니었어? 그럼 어쩔 수 없지.”

 

  분위기 깨는 데 달인인 나카모리 아오코 씨. 그렇게 투덜거리는 걸 넘긴 적이 몇 번인지. 하지만 그럼에도 카이토는 기다려 주었다. 네가 싫은 짓은 나도 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해 주었는데.

  “결혼 전까지는 안 돼! 그, 그런 거…… 할 수 없어. 못 할 것 같단 말이야.”

  그래. 그 말이 카이토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던 것 같다.

 

  “하아?”

 

  딱히 달콤한 분위기에서 나온 말도 아니었지만-오히려 어린애라고 놀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 말이 나온 뒤의 카이토의 표정은 가히 장관이었다.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꽤 당황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멍하던 얼굴이 점점 구겨지더니, 종래에는 한껏 눈썹을 치켜뜨고선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는 듯했다. 그 뒤엔 한숨을 쉬고, 미간을 손가락으로 누른 뒤 입을 열었다.

  “너, 내가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는 건 알고 있는 거지?”

  “당연하지…….”

 

  아무리 남자 초등학생같이 행동해도 카이토는 아오코보다 키도 크고 손도 크며, 체격도 있다. 당연히 알고 있고,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 면에 대해서는 미안하다는 생각도 조금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야, 남자랑 여자는 입장이라는 게 다른 거고…… 받아들이는 것도 다르고, 그건 나도 아는데. 슬슬 ‘어른’이 되어주지 않으면 정말 곤란한데, 아오코 쨩.”

 

  언제는 어린애인 채로 있으랬다가, 이제는 또 어른이 되란다. 심지어 강조했다. 정말 도둑은 거짓말쟁이라니까. 그런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삼키고 아오코는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딱히 괜찮잖아, 그렇게 급하게 굴지 않아도…….”

  “어이……, 진짜 급했으면 진작 해치웠지 무슨 소리야. 그런데 결혼할 때까지 참으라는 건 내가 못 견딜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야. ……아, 그렇지! 그럼 그거잖아? 일단 나랑 결혼할 생각 자체는 있다는 거네, 아오코 씨?”

 

  말하던 도중 갑자기 엄청난 것을 깨달았다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카이토가 몸을 잔뜩 기울여 반대편에 앉은 아오코에게 다가왔다. 속도 모르고 히죽거리기 시작한 그 얼굴이 왠지 열받아 아오코는 그 얄미운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픽 고개를 돌려 버렸다.

 

  “카이토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는 건 싫으니까 아오코가 해 주는 수밖에 없잖아.”

  “솔직하지 못하구만. 이 카이토 님이 좋은 거잖아, 그 정도로? 응? 그럼 그냥 해버릴까?”

  “뭐래.”

 

  피차 학생인 마당에 농담도. 아오코는 눈을 흘기며 어쩐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대화를 종료하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제대로 된 발언이 나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결혼 전까지는 안 된다며.”

 

  하지만 카이토는 대화를 끝낼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아오코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카이토에게 눈을 돌렸다. 어느새 히죽이던 바보같은 얼굴은 사라지고 특유의 꿰뚫을 듯한 눈빛이 아오코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결혼해.”

 

  내던져진 폭탄.

 

  아오코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잠시 생각 프로세스를 점검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왜 이야기가 이렇게 되었는지. 카이토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곧 농담이라며 싱겁게 웃을 것 같았는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이 올곧은 눈빛이 아오코를 향했다.

 

  “뭐?”

 

  그러니 대답이 막힐 수밖에. 하지만 카이토는 멈추지 않았다.

 

  “결혼하자고. 일본은 법적으로 18세 이상이 되면 결혼할 수 있으니까, 전혀 문제없잖아? 우린 이제 부모 동의도 필요 없지. 우리 둘만 합의하면.”

 

  마치 오늘 저녁 메뉴는 뭐냐고 묻는 듯한 거리낌 없는 말투다. 잠시 멍하니 있던 아오코는 곧 이 대화의 시작점을 생각해 냈다. 그래, 아오코가 그런 화제만 나오면 부끄러워해서 동기들이 귀여워했다는, 뭐 그런 이야기에서…… 어린애냐, 하긴 모두 우리가 끝까지 갔다고 생각할 테니까 무리도 아니다, 이런 이야기가 되어서.

 

  “말도 안 돼. 돈도 못 버는 대학생이 결혼해서 뭘 어쩌게?”

  “너, 내가 세계적 마술 그랑프리 우승자인 걸 까먹은 거 아니냐? 내가 그냥 학생이야?”

  “아무튼 안 돼! 당연히 한다면 카이토랑 할 거지만, 지금은 아니야.”

  “왜 아닌데? 아, 당연히 프러포즈는 더 멋지고 화려하게 제대로 할 거니까. 말해두는데 이건 프러포즈가 아니야. 제안이지.”

  “…….”

 

  바보 카이토, 대체 무슨 스포일러를 하는 거람. 당연히 그런 걸로 화내지 않는다. 카이토라면 멋지고 화려하지 않아도, 분명 대담하게 아오코의 마음을 훔쳐 갈 수 있다. 이미 카이토의 것이지만, 몇 번이라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카이토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본인이 어떤 오해를 받을 수 있는지. 아오코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입장이 다른 걸 안다면서…….”

  “말했잖아. 못 견딜지도 모르겠다니까. 뭐, 아오코의 가치관이 혼전순결, 뭐 그런 거면 나는 최대한 존중해 주고 싶지만, 어차피 모로 가도 나랑 할 거잖아? 그렇다면 빠를수록 좋다는 게 내 의견.”

 

  아오코가 비죽 입을 내밀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안다면서. 아오코는 결코 유약하지는 않지만, 겁이 많은 성격이다. 그게 카이토와 관련된 것이라면 더 그렇게 되었다. 끝도 없이 용감해졌다가도, 한없이 무서워지기도 한다. 괴도 키드의 건이나, 사귀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아는 당사자인 카이토에게는 그 사실을 이해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래서야 마치…….

 

  “그렇게 아오코랑 자고 싶어?”

 

  속이 시끄러웠다. 파도가 치는 것 같았다. 덩달아 눈가가 뜨거워질 것 같아서 괜히 힘을 주었다. 물론 소용은 없었다.

 

  “뭐?”

 

  어떤 뜻으로 묻는 건지 알았을 것이다. 카이토는 똑똑하니까. 무엇보다 아오코의 먹구름 낀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을 터. 카이토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마치 카이토가 아오코의 몸이 목적이라 결혼을 하자는 것 같잖아!”

  “뭣, 이 바보가, 그런 뜻이겠냐! 아니, 틀리진 않은 것 같은 게 좀 짜증 나는데. 아니, 아니지. 아니라고! 누가 한번 자보겠다고 결혼을 하자고 하냐, 그건 미친 놈이지!”

 

  카이토가 손사래를 치며 아오코 쪽으로 다가왔지만 이미 아오코는 카이토와 더 말을 섞을 의지를 잃어버린 뒤였다. 아오코가 흘러내리는 눈물을 난폭하게 닦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카이토를 있는 힘껏 째려보았다.

  “바보, 멍청이, 변태야! 그래, 아오코는 어차피 어린애라고! 몸매도 별 볼 일 없는데 뭘 그렇게 넘봐! 진짜 싫어! 바보 카이토!!”

  그리고선 카이토의 뒤로 돌아가 등을 꾹 밀었다. 나가라는 표명이다.

  “야, 야아! 아니라니까. 진정 좀 하라고. 결혼 좀 하자고 했다고 왜 그렇게 되는데!”

  “몰라서 물어!”

  “어어, 밀지 마. 야! 어이! 아오코!”

  “가라고! 누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내줄 줄 알고! 흥이다, 결혼 따위 해주지 않을 거니까!”

  맥없이 아오코에게 떠밀려 현관까지 도달해버린 카이토는 마지막 마무리로 등을 퍽 치는 힘에 문밖으로 다리를 내놓고 말았다. 힘이 왜 이렇게 세?! 최후의 반항으로 외친 목소리는 현관 밖으로 던져진 신발 소리와 쾅 닫히는 문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하. 저녁밥은 어쩌라고.”

당연히 제공되지 않았다.

 

🕓

 

 

  결국 그날 이후로 3일째다. 아오코는 카이토의 모든 연락을 무시하고 우울해 하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히 카이토가 나카모리 가로 밥을 먹으러 오지도 못했다. 긴조와 미도리코는 그 점에 어리둥절하다가 둘이 싸운 것을 눈치채고는 청춘이라며 웃을 뿐이었다.

  카이토의 상태 따윈 모르겠지만, 어제 저녁 마지막으로 온 라인은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다’ 라는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뭐냐고, 이 협박 문구. 그렇게 뒤숭숭한 내용을 보내놓은 것 치고는 지금까지 액션이 없는데.

 

  “원래 남자들은 막…… 그렇게, 그런 걸 하고 싶어 해?”

  “남자친구도 없는 나한테 물어봤자…….”

  케이코가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랬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람. 그렇다고 경험 있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너무 부끄럽고 한심하니까. 아오코가 머리를 흔들더니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 별것 아닌 동작들에 케이코는 쿡쿡 웃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카이토 군이 지금 엄~청 참고 있을 거라는 건 잘 알지. 이렇게 하나하나 귀여운 여자친구를 앞에 두고 2년이나 참고 있으니 얼마나 애가 타겠어. 난 이해가 되네.”

  “케이코…….”

 

  울망하게 케이코를 바라보는 아오코의 눈빛에 케이코는 잠시 속으로 카이토에게 애도를 보냈다. 고생이 많구나. 그렇지만 네가 선택했으니 감내하도록 해…… 뭐, 지원 정도는 해줘 볼 테니. 케이코가 눈앞의 호화 파르페를 한입 떠먹고 크흠, 목을 가다듬었다.

 

  “그치만 최대한 미루고 싶어지는 건, 알 것 같긴 해. 솔직히 여자는 좀 무섭잖아. 그런데 지금 아오코가 계속 불안해하는 이유가 그것뿐이야? 아오코의 몸만 노리는 것 같아서?”

 

  직접 말해놓고도 이상한 말이었다. 쿠로바 카이토에 한해서 그럴 일은 절대 없는데 말이다.

 

  “…….”

  “아니면, 막상 그렇게 지르고 보니 이대로 카이토 군이 에이, 넘어오지도 않는 여자 그만두고 다른 애나 만나자고 생각할 것 같다거나?”

아오코가 눈동자를 굴렸다. 잠시 생각하는 듯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최악의 남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아오코는 카이토의 애정을 잘 알고 있다. 물론 믿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비록 거짓말은 했지만, 세상에서 아오코가 제일 중요하다고는 말해주지 않지만, 그래도 카이토는 아오코를 사랑한다.

 

  “그럼 왜?”

 

  케이코가 물었다. 아오코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서 더 불안했을지도.”

 

  요컨대, 현상 유지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른이 되지 않아도 돼, 그냥 이대로여도 카이토는 아오코를 사랑해 주니까.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카이토는 점점 어른이 되어 간다. 아오코만 그 자리에 남겨두고.

 

  “변화하는 건, 무서워.”

 

  아오코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결국 다 아오코의 아집이다. 카이토가 모두 이해해 줄 것을 믿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남자니 여자니 하는 것도 이제 핑계에 불과하다. 2년이 지났는걸. 아오코도 안다. 카이토가 얼마나 참아주고 있는지. 모를 리가 없어.

 

  “카이토가 정말로 내 몸만 목적이었다면, 진작 떠났을걸. 아오코도 알아. 미래를 함께한다면 당연히 카이토랑 같이 있고 싶다고도 생각해. 그런 단계가 연인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거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초코 파르페가 녹아 간다. 아아, 카이토랑 같이 먹자고 했는데. 매번 이렇게 고집만 부리니까 안 되는 거다. 대체 어디까지 참아줄 거야, 카이토 바보. 멍청이. 참기는 왜 참을까? 괴도 키드 씩이나 했던 남자가, 그 화려한 달변이라도 이용하면 이런 여자쯤 자기 맘대로 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사실, 설령 몸만이 목적이었더라도 아오코는 넘어가 줬을 것이다.

 

  “무섭단 말야.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잖아. 막상 해보니 별 볼 일 없다고 생각되는 것도 무섭고, 그걸 억지로 참게 하는 건 더 무서워.”

 

  쓸쓸히 중얼거린 아오코가 녹아가는 파르페 속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달아. 엄청 달다. 카이토가 딱 좋아할 맛이었다.

 

  “흐음, 어렵네…….”

 

  아오코의 말을 경청하던 케이코가 고민하는 소리를 흘렸다. 솔직히 나카모리 아오코만 관련되면 물불 안가리는 그 쿠로바 카이토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만. 케이코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모르는 아오코는 아이스크림을 삼킨 후 앞에 놓인 아이스티를 마시고 음료잔을 내려놓았다. 탁, 잔이 작게 테이블과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아오코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바보 카이토는 사람 마음도 모르고! 결혼을 하네 마네, 내가 결혼하면 뭐가 달라질 줄 알고? 본인만 더 힘들어질걸? 아아, 정말 섬세함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진짜 바보야. 애초에 왜 그렇게 아오코를. 맨날 가슴이 없네 몸매가 일자네 놀렸으면서. 바보.”

  “바보를 몇 번을 말하는 거야? 이 바보 아오코야.”

  “흐아악?!”

 

  그렇게 한창 열변을 토하고 있는데, 소리소문없이 옆에서 들려온 화제 속 주인공의 목소리에 아오코는 놀란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데시벨이 크진 않아 다른 손님들은 아오코의 테이블 쪽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들 본인들의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어머.”

 

  전혀 눈치 못 챘네. 과연 프로 마술사. 케이코도 놀란 입가를 가리며 갑자기 나타난 카이토를 바라보았다.

 

  “여어.”

 

  케이코와 눈이 마주친 카이토가 한 손을 들어 짧게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은 마치 둘이 여기에 온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여유작작했다.

 

  “어떻게 알고 왔어?!”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아오코가 빽 소리를 질렀다. 카이토는 아무렇지 않게 팔짱을 끼고 반눈을 뜬 채 대답했다.

 

  “다 방법이 있지요, 아오코 씨. 여기저기 제 첩자가 많습니다.”

  “뭐어?! 나한테 사람 붙였어?!”

  “바보 아오코, 네 행동반경 같은 건 이 좋은 머리로 3초만 생각해도 금방 알 수 있거든?”

  “하아? 솔직히 말해. 뒤가 구린 짓 했지?”

  “무슨? 그런 짓 안 했는데? 어디의 누가 이 호.화.초.코.파.르.페를 같이 먹자고 한 약속을 홀랑 깨고 먼저 가서 쓱싹 먹고 있는 게 더 뒤가 구린 짓 아닌가?”

  “그, 그건……!”

 

  눈앞에서 투닥거리기 시작한 바보 커플을 보며 케이코는 조용히 라떼를 다 마신 후 짐을 챙겼다. 저 둘과 달리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카이토가 아오코를 쫓아 나타난 이상 이제 이곳에서는 빠져줘야 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좋은 친구를 뒀다는 걸 부디 저 둘이 알아야 할 텐데. 그런 우스개 생각을 하면서.

 

  “자자, 서서 그러지 말고 앉아. 나는 빠져 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일어선 케이코가 카이토에게 슬쩍 윙크를 했다. 피식 웃은 카이토는 사양도 없이 케이코가 일어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우. 넌 진짜 좋은 녀석이야, 케이코.”

  “어디 가, 케이코!”

  “나한테 말한 거, 그~대로 카이토 군한테 다 말해주는 거야, 아오코! 방해꾼은 빠져 줄 테니까! 힘내!”

 

  울상이 되어 케이코를 붙잡으려는 아오코에게 상쾌한 미소를 지어준 케이코는 그대로 카페를 나가 버렸다. 아무렴, 본인이 해결하시겠다는데. 카페를 나온 뒤, 3일 못 본 걸로 혈안이 되어 아오코를 쫓아왔을 카이토의 초조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카이토와 아오코는 노을이 지고 있는 주택가를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카이토가 자리에 앉은 후 다른 종류의 파르페를 하나 더 시켜서 먹었지만, 아오코는 너무 긴장하고 먹은 탓에 뒤에 나온 파르페는 어떤 맛이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불편해하는 아오코는 아랑곳하지 않고 잘만 먹던 카이토의 모습을 생각하면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그래서 진짜 왜 온 거야. 파르페가 그렇게 먹고 싶었어?”

 

  아오코는 케이코가 빠져 준 것이 무색하게 카페 안에서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토도 그다지 이야기를 하러 온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먹을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더욱 혼란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얘는 나랑 뭘 하고 싶은 걸까? 생각이 있다는 게, 아오코를 무작정 쫓아다니겠다는 이야기였나?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힘없이 나온 아오코의 목소리에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말없이 걷던 카이토가 눈동자만 굴려 아오코를 슥, 바라보았다.

 

  “생각을 좀 해 봐라. 내가 그거 먹겠다고 널 쫓아갔겠어?”

 

  불퉁하게 내뱉어진 말에 아오코의 발걸음이 멈췄다. 카이토 역시 조용히 멈춰선 후 팔을 내리고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었다. 곧 아오코가 울컥한 얼굴을 홱 들었다.

 

  “그럼? 아주 잘도 먹던데, 왜? 혹시 헤어지자는 말이 안 나와서 그렇게 먹었어? 그럼 지금 얼른 말해. 아오코, 지금이라면 체할 일도 없고 잘 들어줄 수 있거든!”

 

  아아, 거짓말. 또 귀엽지 않은 말이나 하고. 아오코는 치켜뜬 눈에 힘을 꽉 주었다. 안 그러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2년 동안 자주지도 않고 이런 못된 말이나 하는 여자애, 세상천지 아오코 뿐일거야. 카이토가 그럴 리가 없는 걸 잘 알고 있는데. 지금 이 말에 정나미가 떨어져서 진짜 헤어지자고 하면 어떡하지? 카이토만큼 아오코를 사랑해 주는 사람, 또 만날 수 있을까?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없을 거야.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오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이토가 큰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심도 아닌 말을 왜 그렇게 해.”

  “…….”

 

  툭, 아오코의 머리에 무게가 실렸다. 카이토의 손이었다. 잘 정돈한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이 카이토의 손에서 쓱쓱 어질러졌다. 카이토가 미소지었다.

 

  “바보 같은 아오코. 지레 겁먹고 도망 다니고. 어차피 이렇게 잡힐 건데.”

  “잡히긴, 누가…….”

 

  이쯤 되면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오코가 미약하게 반항을 보였지만, 카이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연락은 받으라고. 안 그러면 이렇게 미쳐서 쫓아오거든? 진짜 치사하게, 내가 좋아할 것 같다고 같이 가자고 한 데를 케이코랑 같이 가고 말이야. 그건 아니지, 아오코 쨩. 모든 처음은 나랑 같이 해줘야지. 응?”

 

  아무렇지 않게 케케 웃으며 이야기하는 카이토를 보며 아오코가 눈썹을 늘어트렸다. 참고 있던 눈물은 이미 그렁그렁 맺혀 버렸다. 머리가 흩뜨려지는 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카이토는 정말, 바보 같아.”

  “누가 할 말을.”

  “바보 카이토.”

  “그래, 그래. 바보 아오코.”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있는가 하면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이 있다. 가령, 아오코의 눈가를 조심스레 쓸어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 같은 것.

 

  “왜 왔냐고?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지. 도망가려고 하는 공주님을 붙잡아야 하니까. 당연한 거 아냐?”

 

  아오코의 얼굴에서 손을 뗀 카이토가 마지막으로 아프지 않게 이마를 찰싹 치고는 환하게 웃었다. 노을이 스민 그 얼굴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져 아오코는 더욱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있지, 아오코.”

  “응…….”

 

  계속되는 카이토의 말에 아오코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카이토도 아오코의 보폭에 맞춰 함께 걸었다.

 

  “미안. 너무 급했다고 나름대로 반성했어. 물론 나는 아오코랑 평생 함께하고 싶고, 아오코도 그럴 거라고 믿고 있는데, 아직 내가 아오코한테 별로 믿음을 주지 못했다면 전적으로 내 탓이겠지. 네 몸만 노리는 건 당연히 아니라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그냥, ……너무 겁을 준 것 같더라고. 미안해. 그냥 놓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그러니까 도망치지만 마. 그건 정말……, 참기 힘드니까.”

 

  그렇지 않아. 다 아오코가 겁이 많은 탓이야. 카이토는 나쁘지 않아.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카이토가 아오코의 손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마술사의 잘 관리된 손이 아오코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아,

카이토가 좋아.

가라앉는 노을 사이에서, 아오코는 그런 생각을 했다.

 

  “카이토.”

  “엉―.”

 

  어느새 맞잡은 손이 앞뒤로 장난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오코가 울먹이는 동시에 미소지었다. 알고 있어? 카이토는 사실 아오코에게 마법사야. 처음 만났을 때도, 지레 자신감을 잃고 카이토에게서 떨어지려 했을 때도, 아오코가 키드를 노린 함정에 빠졌을 때도, 아빠가 총에 맞아 위험했을 때도…… 아오코가 외롭고 무서울 때마다, 늘 카이토는 함께 있었다. 모습이 달라도, 카이토는 카이토였다.

 

  “보통 2년을 참은 걸 급했다고 하지 않아.”

  “그런가? 그치만 겁쟁이 어린애 아오코한테는 너무 빨랐을 수도 있지.”

  “……그래요. 어차피 어린애네요.”

 

  아오코가 중얼거리자 카이토가 슬쩍 아오코를 곁눈질하고는 맞잡은 손을 들어 올렸다. 아오코의 눈길이 카이토를 향했다.

 

  “하지만 이 카이토 님이 3년이든 4년이든 기다려 주겠다고. 그런 거, 특기거든.”

 

  그러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똑바로 와.

  씨익 웃는 카이토를 보며 아오코도 무심코 푸훗 웃어 버렸다.

  “드디어 웃네. 아, 나카모리 아오코 비위 맞추기 힘들다, 힘들어.” 

 

  투덜거리면서도 기분 좋은 듯이 웃는 그 모습에 아오코는 마음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변화가 무서워. 아오코, 진짜 겁쟁이지?”

“ “아오코는 원래 겁쟁이니까 놀랍진 않아―. 정말 내가 없으면 안되겠다, 싶지.”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카이토가 또 카이토다워서, 아오코는 웃음지었다.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카이토만큼은.

 

  “저기, 카이토.”

  “왜?”

  “……하자. 결혼.”

  “어……, ……어?!”

 

  반사적으로 답변하던 카이토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걸음을 멈췄다.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하는 표정에 아오코가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잡히지 않은 손을 뻗어 아까 자신이 당한 대로 카이토의 머리를 북북 쓸었다.

 

  “해 줄게. 카이토가, 변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그게 아오코의 조건. 그거면 돼.”

 

  하지만 이미 알고 있어. 카이토는 카이토고, 계속 변하지 않고 아오코와 있어줄 거라는 걸. 아오코가 아무리 못나고 고집쟁이여도, 카이토는 아오코를 계속 사랑해 줄 거라는 걸.

 

  “…….”

  카이토가 멍한 표정으로 아오코를 바라봤다. 얼마나 그렇게 서로 눈만 마주치고 있었을까. 퍼뜩 정신이 든 듯 카이토가 헉 소리를 내고는 잡고 있던 손을 다급하게 풀었다. 그리고 곧 카이토의 손안에서 퐁 소리와 함께 푸른 장미가 나타났다.

 

  “이거 받으면 이제 못 무른다. 무르기 없기.”

  “아하하.”

 

  바보 같아.

 

  “응, 잘 부탁해. 쿠로바 카이토 군!”

  “앗, 내 대사! 으아, 아오코, 새치기를 하다니……!”

 

  장미를 받아든 아오코가 화사하게 웃었다. 그런 아오코를 눈앞에 둔 카이토가 두고 봐, 정식 프러포즈는 아주 눈부시고 화려하게 해내고 말 테니! 하며 어린애처럼 주먹을 쥐고 다짐하고 있었다.

  아오코는 파란 장미의 향기를 맡았다. 많은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앞으로도 카이토와 함께 있고 싶어.

  차근차근 어른이 되어 가자.

  “아오코.”

 

  어느새 다가온 카이토가 아오코의 얼굴을 가볍게 쥐었다. 아, 이 신호는 알고 있어. 함께 만든 것이다.

 

  시끄럽던 마음이 잔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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