墜落(추락)
슌
Prologue.
커다란 새가 추락한다.
온갖 목소리가 섞인 틈으로 하얀 날개를 휘날리며 떨어지는 그 모습은 하나의 명화와도 같았다. 순간의 정적이 흐른다. 동시에 사람들은 생각한다. 저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동시에 너무나 편안해 보인다고. 그래서 그들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또한, 그의 추락을 보던 하쿠바 사구루와 코이즈미 아카코는 탄식한다. 결국, 네가 추락하고 마는구나, 하고.
1.
나카모리 아오코는 원체 몸이 약했다. 정확히는 병실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보다 잔병치레가 조금 많은, 딱 그 정도로. 하지만 그것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그녀의 몸이 신호를 조금씩 보냈다. 이제 더는 시간이 없다는 듯, 그렇게.
그러니까 나카모리 아오코의 죽음은 꽤 빨리 예정되었던 것이었다. 그저 소리 없이 다가왔을 뿐, 당사자인 그녀는 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녀의 나이는 고작 25살, 조용히 눈을 감기에는 너무나 젊은 나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예정된 죽음을 모두가 받아들였다. 그녀의 아버지인 나카모리 긴조부터 친구들과 이웃들까지. 모두가 나카모리 아오코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였지만, 금방 인정하고 받아드렸다. 그 과정에서 나카모리 긴조가 혼절하는 과정이 일어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말이다.
그 속에서 나카모리 아오코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생전 그녀의 소꿉친구이자 연인인 쿠로바 카이토, 그뿐이었다.
쿠로바 카이토는 그녀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단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나카모리 아오코의 죽음을 겪고서 이상행동을 반복하였다. 아니, 어찌 보면 혼이 나간 듯 행동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는 그녀의 장례식이 이어지는 사흘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또한, 그녀의 장례식에 꽃 또한 놓지 못했다. ‘못했다’라고 말한 이유는 그가 그녀의 영정 사진 속의 웃는 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미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하루, 이틀 그리고 사흘이 지나가도록 그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나카모리 아오코의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고작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을 때 찍었던 사진을 말이다.
그런 그에게 친구인 하쿠바 사구루와 코이즈미 아카코가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다그치며 위로를 하며 정신을 차리라고 말한다. 어찌 되었든 나카모리 아오코는 죽었으며, 쿠로바 카이토는 살아있기 때문에. 그들은 죽은 친구를 향한 그리움과 슬픔을 억눌렀다.
둘에게는 어떻게든 눈앞에 있는 이를 지켜야 했다.
하지만 쿠로바 카이토는 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주욱.
그렇게 나카모리 아오코의 장례식은 막을 내렸다. 쿠로바 카이토, 유일한 소꿉친구이자 연인의 인사만을 받지 못한 채로.
2.
괴도 키드.
세간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대괴도였다. 주로 빅주얼을 노리는 젊은 괴도,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바다 너머 있는 싱가포르에도 그의 명성이 자자할 만큼이나.
또 그가 인기 있는 이유는 훔친 보석을 다시 돌려준다는 사실이었다. 뭐 그럴 때마다 나카모리 긴조가 더욱 불타오르며 그를 잡기 위해 노력하는 거지만 말이다. 암튼 그는 유명했으며, 인기 또한 많았다. 매너 넘치는 행동까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부터 돌연 잠적했다. 괴도 키드의 잠적, 사람들에게 가십거리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전에도 잠적한 전적이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떠들어댔고, 경찰은 그에게 집중했던 정신을 잠시 환기했다. 그렇게 그가 잠적한 지 어언 5년이 지나고, 괴도 키드가 재등장했다.
하지만 다시 나타난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전과 조금 달랐다. 아니, 조금이라기보다는 많이. 왜냐하면, 그에 관해 다루는 기사 제목에는 무조건 ‘목숨’, ‘위험한’ 이란 키워드가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말했다. 그를 기다리던 오랜 팬들은 그에게 왜 그러냐며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괴도 키드는 그들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위험한 퍼포먼스를 성공하며 위태롭게 제자리 위에 서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부터는 그 수위가 조금씩 높아져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간신히 제 목숨을 챙긴 그는 순간적으로 조금 아쉽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마술사였기 때문에 그의 포커페이스가 뚫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 그를 눈치챈 건 그의 동창이자 친구인 하쿠바 사구루와 코이즈미 아카코, 둘 뿐이었다.
* * *
“미쳤구나. 쿠로바 카이토!”
코이즈미 아카코가 괴도 키드, 아니 쿠로바 카이토의 멱살을 거칠게 잡았다. 분노로 타오르는 진홍빛 눈동자와 텅 빈 눈동자가 서로 마주했다. 하, 코이즈미 아카코가 헛숨을 내쉬었다. 미쳤구나, 정말로.
나카모리 아오코가 쿠로바 카이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이건 아니었다. 멱살을 잡은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간다. 그런 아카코를 하쿠바 사구루가 받아 안았다.
“제발, 놓으란 말이야.”
“…….”
“그 아이, 나카모리 아오코 좀 놓으라고.”
점점 갈라지는 목소리로 아카코가 애원했다. 그런 아카코를 가만히 바라보던 하쿠바 사구루가 카이토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만 해요, 나카모리 양을 그만, 놓아줘요.”
“…….”
“하아,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쿠로바 카이토는 한때는 라이벌, 앙숙이었지만 서로를 가장 이해할 수 있던 친구인 그의 애원에도 카이토는 답하지 않았다. 무겁게 닫힌 그의 입은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고도 하쿠바 사구루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머뭇거렸다. 사구루 군, 가자. 그런 그의 손을 아카코가 잡아끌며 자리를 벗어났다.
쾅-.
“하아….”
쿠로바 카이토는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근처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몸이 뒤로 젖혀진다. 푹, 폭신한 소파에 머리통을 깊숙이 묻었다. 그렇게 멍을 때리기를 한참, 그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눈이 감겨왔지만, 그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니, 자고 싶지 않았다.
요즘 그의 상태는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잠이 들려고만 하면 제 침대 위에 누워 잠든 연인의 모습이, 밥을 먹으려고 부엌에 내려오면 앞치마를 입은 채 아침을 준비하는 그 아이의 뒷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는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환상임을 금방 깨달았다. 하지만 무력하게 손을 내밀어 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닿고 싶었고, 만지고 싶었으며 잡고 싶었다. 제 곁으로 붙잡아서 다시는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도록. 나카모리 아오코가 쿠로바 아오코가 되고, 자신과 같이 왼손의 약지에 반지를 나눠 끼우는 그 순간까지. 아니, 그 아이가 평생을 저와 함께 살다, 함께 죽을 그날까지.
일어나면 언제나 자신을 반겨주는 그녀가, 같이 아침을 준비하고 같은 식탁에 앉아 시작하는 그 일상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쿠로바 카이토는 언젠가 강렬하게 바랐던 꿈을 꾼다.
이제는 실현조차 될 수 없는 헛된 꿈을.
3.
카이토, 일어나.
상냥하고 다정한 음성이 그를 깨운다. 나비의 날갯짓과도 같은 다정한 손길이 뺨을 두드린다. 그 속삭임에 카이토는 얼굴을 작게 찡그리며 눈을 작게 떴다. 빛을 접한 눈이 약간 흐려졌다. 하지만 이내 곧 뚜렷해지는 시야 속 그가 가장 사랑하는 푸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허리를 굽힌 탓에 제가 좋아하는 갈색 머리칼이 커튼처럼 드리운다. 햇살이 그사이 틈으로 새어 들어온다. 쿠로바 카이토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살살 정리해주는 손길을 천천히 음미하였다. 푸흐흐, 제가 좋아하는 맑은 목소리가 조용한 방을 채웠다.
“오늘은 어디 가야 한다고 했잖아.”
다정한 물음에 카이토가 장난스럽게 답한다. 동시에 그녀의 얇은 허리에 제 팔을 조심스레 두르며, 그렇게.
“가지 말까?”
하하, 아까보다 조금 커진 웃음소리가 귀를 두드린다. 웃음이 점점 흐려지고 그녀가 말한다. 쿠로바 카이토 씨.
“일어나요, 아침이라구?”
쪽. 보드라운 것이 입술에 닿았다가 삽시간에 떨어진다. 자신을 드리우던 그늘 또한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멍하던 카이토가 도망치는 그녀를 잡지 못했다. …하.
“당했네….”
그런데도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입가를 매만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침을 준비해야 했다.
* * *
둘이 사귀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졸업 날부터였다. 고백을 한 사람은 쿠로바 카이토 군이요, 고백을 받은 것은 나카모리 아오코 양이었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하쿠바 사구루의 말을 빌리자면, 그때의 쿠로바 카이토는 평소와 달랐고 멋들어진 고백도, 꽃다발도 없이 오직 푸른 장미 한 송이를 내밀며 제 마음을 날 것 그대로 고백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멋이 없었다.
쿠로바 카이토는 순순히 인정했다. 다분히 충동적인 고백이었으며 말도 더듬었다. 과연 이것을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지, 카이토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곧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고민마저 날아간다. 좋아, 라고 말하며 해맑게 뺨을 붉히며 답하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쿠로바 카이토는 제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혹시 몰라 고백을 안 받아주면 어쩌지 하며, 꽤 오래전부터 생각해둔 멘트가 혀끝에서 모래처럼 사그라지는 것을 느낀다.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제 앞의 여인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둘은 연인이 되었다.
사귀기 시작하고 2년 정도 지난 뒤에 쿠로바 카이토와 나카모리 아오코가 동거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조금 빠른 느낌은 있었지만 말이다. 나카모리 긴조의 강한 반대가 있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동은 간단했다. 아오코의 짐을 쿠로바 네로 옮기는 작업만 하면 되었으니까.
단 그녀가 오고 나서부터는 쿠로바 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침대는 조금 커졌고, 커튼은 전보다 밝은색으로 바뀌었다.
그녀와 지내기 시작하면서부터 벽지는 조금 따스함을 머금었고, 소파는 전보다 더 폭신한 것으로 바뀌었다. 모두 아오코와 카이토가 같이 정하고 -고르는 제 여자 친구 모습이 귀여워 그녀의 의견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 분명했지만- 같이 산 것이었다.
점점 무채색과 같던 집이 제 색을 머금어간다. 그 중심에는 제가 사랑하는 푸름이 있었다. 그 사실 하나로 쿠로바 카이토는 자신이 포기한 모든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카이토? 연한 하늘색 치마가 하늘거리면서 곡선을 그린다. 동그랗게 눈을 뜨며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모습에 속절없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남자는 제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여인에게 답한다.
“어, 갈게-.”
어떻게 저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지? 그 순간의 쿠로바 카이토는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한 남자였다.
4.
누군가가 그랬던가,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한 순간에 꼭 절망이 찾아오는 법이라고. 쿠로바 카이토는 깊게 그 말을 실감했다. 두 눈이 흐려진다. 숨은 점점 거칠어져 갔다. 그러자 곧 초췌한 인상의 여인이 호흡기를 통해 그에게 말한다.
“카, 이토. 울지, 마.”
응? 고통 때문에 끊기는 게 분명한 목소리에 남자의 흐느낌이 멈춘다. 간신히 끌어올린 미소와 여느 때와 다름없으려 애쓰는 다정한 음성에 쿠로바 카이토는 패배감을 간신히 삼킨다. 카이토는 언제나 느껴왔던 달콤함이 아닌 쓰고 지독한 패배감에 입안이 써오는 것을 느낀다.
그래, 내가 너를 어떻게 이기겠어.
쿠로바 카이토는 나카모리 아오코를 이길 수 없었다. 그것은 쿠로바 카이토의 세상에서 진리요, 모든 것에 대한 절대적이었다. 남자는 미소를 외면하고자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러자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것이 느껴진다.
그는 제 두 손으로 잡은 작은 손을 생명의 동아줄을 잡듯이 잡고서는 빌었다. 그에게 나카모리 아오코란 모든 것이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얻은 단 하나이자, 제가 가진 유일한 보석이었다. 아버지를 죽인 조직을 박살내겠다는 모든 다짐을 포기한 채 선택한 유일이다.
그런 소녀마저 가져가려는 신에게 쿠로바 카이토는 간절하게 빌었다. 제발, 자신에게서 아오코마저 앗아가지 말아 달라며, 그렇게.
하지만 신은 쿠로바 카이토의 소원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지금보다 어린 그 날부터 지금까지.
삐- 거리는 소리와 제 손안에 있는 작은 생명에서 힘이 빠져가는 것을 느꼈다. 남자가 두 눈을 황급히 뜨니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을 여인이 곱게 눈을 감고 있었다. 혹자가 그랬던가, 신은 언제나 가장 행복한 순간에 절망을 준다고.
“아, 오코?”
왜 그 말이 떠오른 것일까. 남자가 사랑하는 푸름을 입에 담는다. 분명 좀 전까지 분명 살아있었을 이의 이름을. 제발 눈 떠. 다시 한 번만, 제발. 남자가 애원한다. 그런 순간에서도 옆에서는 그녀의 죽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의 이성은 금방 정보를 처리해 그녀의 상태를 알렸다. 쿠로바 카이토는 제 좋은 머리가 이때만큼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그렇게 쿠로바 카이토는 나카모리 아오코의 죽음을 곁에서 본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날, 그의 세상을 가득 채웠던 유일한 푸름이 사라졌다.
5.
나카모리 아오코의 죽음이 이뤄진 날, 쿠로바 카이토는 멍하니 잠든 시체 옆에 앉아있었다. 급하게 찾아온 나카모리 긴조는 험악한 분위기를 띄우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텅 비어 버린 눈동자가 중년의 사내를 흐릿하게 비춘다.
나카모리 긴조는 그런 눈동자를 마주 보다가 결국은 외면하고자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자신의 슬픔에 눈앞이 가려져 자신과 같이 고통에 휩쓸린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한 조금 전의 본인을 탓하면서, 그렇게.
나카모리 아오코의 장례식은 금방 이뤄졌다.
사람들이 오가며 나카모리 아오코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영정 사진만을 응시하는 남자에게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남자, 쿠로바 카이토는 끄떡도 하지 않았으며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제 앞에 아오코가 있었다.
사진 속에서 활짝 웃는 네가. 아오코, 아오코, 아오코. 그제야 어딘가 지워진 어딘가가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아, 분명 쓰러진 너를 구급차로 태우고 가던 도중에 너는, 내 앞에서-.
죽었다.
네가 죽었다.
나카모리 아오코가 죽었다.
멍한 머릿속을 지독한 단 하나의 사실이 채운다. 쿠로바 카이토는 가쁜 숨을 쉰다.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눈에서는 눈물이 주룩 하고 흘러내린다. 아직 나는 너를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왜, 왜. 남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향해 잘 가라는 인사조차도.
보내기 싫다는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그는 자신의 푸름을 놓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모래와도 같았으므로 손으로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르륵, 손틈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간다.
* * *
“쿠로바 군, 정신 좀 차려.”
“…….”
코이즈미 아카코가 이를 악물며 말한다. 그러나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쿠로바 카이토는 무시했다. 아니 그것은 무시라기보다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코이즈미 아카코와 하쿠바 사구루는 그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면서 그를 다그쳤다.
“쿠로바 군? 정신 좀 차려봐요.”
“쿠로바 카이토, 정신 차려. 부끄럽지도 않아? 그 아이가 보면 퍽이나 좋아하겠네.”
“…….”
아오코를 담는 그들의 말에 텅 빈 눈동자가 반응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다시금 가라앉았다. 사구루와 아카코는 그런 카이토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더는 뭐라고 하지 못한 둘은 한숨만 내쉬고서 그를 떠났다.
길고 긴 장례식이 끝이 났다.
쿠로바 카이토는 나카모리 아오코가 죽었다는 사실을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인지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의 죽음을 두 눈으로 겪었기에 받아드릴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보낼 수가 없었다.
제 얼굴을 덮고 있는 두 손을 내리자 따뜻한 노을이 가득 들어찬 천장이 보인다.
‘따뜻, 한가?’
이제는 그저 그런 노을로 보일 뿐, 더는 따뜻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누워있는 이 소파가 그녀와 함께 골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단을 올라 위층에 가면 너와 함께 누웠던 침대가 있고, 거실과 이어진 부엌에 있는 앞치마가, 그래 바로 네가 쓰던 것을. 그제야 쿠로바 카이토는 깨닫는다.
이 공간 속 모든 것에 나카모리 아오코의 손길이 닿았다는 사실을.
속이 울렁거린다. 입안에 지독한 쓴맛이 퍼진다. 분명 따뜻하고 포근했었을 공간이었을 텐데. 지금은 차갑고, 딱딱하기만 하다. 이 모든 곳에 네 흔적이 있어. 그 사실이 너무나도 설레어 잠 못 이루는 나날이 생각난다. 그제야 네가 없는 이곳을 실감했다. 마르고 거친 입을 통해 잠긴 음성이 흐른다.
“왜, 네 손길은 가득한데….”
너만 없을까. 의문 아닌 의문이 혀끝을 맴돈다.
6.
괴도 키드가 다시 등장했다. 실로 5년 만에. 봄이 시작되는 3월, 스즈키 지로키치 앞으로 태양을 형상화한 보석, 솔라리스를 가져가겠다는 예고장이 날라왔다. 그 예고장을 받은 당사자와 그 소식을 알음알음 접한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모든 미디어에서 그에 대한 온갖 추측을 앞세울 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반평생을 바쳐 그를 쫓았던 나카모리 긴조만이 그랬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자신의 딸, 나카모리 아오코가 죽고 괴도 키드는 다시 등장했다.
실로 나카모리 긴조만이 눈치챌 수 있는 괴리감이었다. 자신의 딸이 죽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괴도 키드가 다시 나타났다니, 이상한 연관성에 헛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긴조는 더는 웃을 수가 없었다. 괴도 키드의 퍼포먼스를 보았기 때문에. 긴조의 머릿속에 무수한 의문이 떠올랐다. 저기 있는 괴도 키드가 과연 자신이 평생을 바쳐 쫓고 있는 괴도 1412가 맞는가?
그를 쫓아다니는 반평생 동안 긴조는 몇 가지를 알 수 있었다. 그건 시간이 주는 당연한 깨달음으로 긴조에게는 자연스래 학습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절대로 목숨을 바쳐가며 저딴 퍼포먼스를 하지 않는다.
물론 그의 퍼포먼스는 대단했다.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동시에 위험천만했으며 온몸을 내던지는 멍청한 짓이었다. 언뜻 보면 그는 그것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아니면 제 목숨을 건 게임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한 긴조가 놀란 이유는 하나가 더 있었다.
달밤 한가운데, 높은 빌딩 위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강한 바람에 금방 날아갈 것처럼 보인다. 분명한 건 저기 있는 하얀 괴도는 나카모리 긴조가 쫓던 그것의 모습과 매우 동떨어져 있었다.
“저 모습은 대체….”
그는 곧 추락할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금방이라도 말이다.
7.
쿠로바 카이토, 아니 괴도 키드는 유유히 행글라이더를 타며 한 높은 건물에 잠시 안착했다. 그리고 이번에 훔친 보석을 들어 올려 습관처럼 달빛으로 비춰보았다. 솔라리스를 달빛에 비추어 보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아 꽝인가.’
다시 활동을 재개하자마자 꽝이라니, 속이 조금 쓰리긴 했다만 상관은 없었다. 판도라를 찾은 것은 이미 오래전에 관둔 일이었으니까. 괴도 키드가 잠적한 5년, 그 5년 동안 쿠로바 카이토는 괴도 키드의 모습을 포기했다. 실로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잠적이었으며, 그가 가장 행복했던 5년이기도 했다.
‘이 버릇도 고쳐야 하는데.’
하지만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래전에 포기한 의무와 책임뿐이었으므로,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 지금 이 버릇을 고치기 어렵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쿠로바 카이토는 다시금 괴도 키드가 되기를 선택했다.
커다란 새가 다시금 날개를 펴고 날기 시작한다.
이번 뉴스 앞머리에는 또다시 괴도 키드의 이름이 올랐다. 유명한 심리학 교수들조차 그의 이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이 알아낸 것은 그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뭐 그 당사자는 태평하게 또다시 목숨을 건 퍼포먼스를 시작했지만.
‘오, 이번엔 진짜 죽겠는데.’
그는 무감하게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는 두려워하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걸음이 멈추지도 않았다. 안전장치 하나 없이 미친 짓을 -그는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놀랍게도 자기가 하는 짓이 미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행하는 것도 꽤 되었다. 하지만 사람의 본능이란 건 죽음을 피하고자 발달했던지라 언제나 살아남긴 했다만 말이다.
괴도 키드, 아니 쿠로바 카이토는 순순히 인정했다. 자신은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퍼포먼스를 자행할 리가 없었다. 이미 그의 좋은 머리는 객관적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변명해보자면 지극히 정상인에 가깝던 제 감각은 그날 이후로 더 자극적인 것을 원했고, 그는 그 감각에 충실했을 뿐이다. 이 현상을 사람들이 ‘미친 짓’이라고 말하는 것뿐이지.
아, 익숙한 환영이 그를 반긴다. 바람에 의해 흐트러지는 하얀 원피스가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다. 낮달과도 같은 미소를 지은 그가 다시금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8.
월하의 마술사 괴도 키드. 그는 지금 제 이명에 맞게 보름달 아래에 서 있었다. 그것도 이 근방에서 가장 높은 빌딩 위에. 그 아래에는 경찰차들이 어지러이 세워져 있었으며, 경광등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아 밑을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시끄럽네.”
그저 시끄러웠다. 귀를 막고 도망치고 싶었다. 화려한 색채가 눈앞을 어지럽힌다. 그래서 그는 눈을 감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짧은 웃음을 내뱉었다. 곧 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고, 눈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럼 이 지독한 환상에서도 도망칠 수 있겠지.
그는 익숙한 가면을 쓴다. 자신이 친애하는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가면을. 하얀 구두가 내딛는 동시에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하얀 망토가 이리저리 휘날리고,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모자 앞부분을 잡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등장이었다. 어두운 장막 아래, 그의 모습만 뚜렷하다. 사람들은 아까의 걱정은 뒤로하고 열광했다. 그는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코앞의 난간으로 향했다. 자신의 마지막 쇼를 위해서.
“그게 정말일까?”
“뭐가?”
“오늘이 키드님의 마지막 쇼라는 것 말이야! 넌 기사도 안보냐.”
“무슨, 장난이겠지. 마지막 쇼라니.”
“그렇겠지?”
한 높은 빌딩에 모인 많은 사람은 모두 같은 주제로 떠들어댔다. 그 이유는 오늘 뉴스에서 말한 내용 때문이었다.
괴도 키드의 마지막 쇼.
그야말로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릴 만한 소식이었다. 도전장도, 도발도 그 무엇도 없었다. 그저 나카모리 경부 앞으로 그의 예고장이 날아왔을 뿐. 어떤 이는 그게 거짓말이라며 외면하였고, 또 그에게 자리를 빼앗긴 누군가는 그가 드디어 추락한다며 저열한 기쁨을 누렸다.
온갖 미디어는 그의 마지막 쇼에 대해 여러 가지 가설을 내세웠으며, 거짓된 정보를 퍼트리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예고장 외에 어떠한 답도 내놓지 않았다. 그저 근방 가장 높은 빌딩에서 자신의 마지막 쇼가 이뤄진다는 이야기만 해놓고서.
건물 앞에 모인 사람들의 치열한 공방이 오간다. 요즘 그가 이상행동을 많이 했더라도, 마지막 쇼라니 그런 일은 없을 거라며. 12시 정각이 된 그때였다.
“Ladies and gentlemen, It's a show time-!”
오늘의 주인공, 괴도 키드의 등장이었다.
9.
하쿠바 사구루는 소파에 제 몸을 깊게 묻었다. 그리고는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입안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그는 앞에 놓인 리모컨을 잡아 들어 TV를 틀었다. 하쿠바 사구루는 조심스레 컵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곧 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괴도 키드의 쇼가 실시간으로 중개되고 있었다. 드론에 달린 카메라가 그의 뒷모습을 담는다. 평소와 같았더라면 그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쇼라니, 처음 듣는 얘기였다.
하쿠바 사구루는 나카모리 아오코가 죽은 그날부터 이상해진 카이토를 돌려놓지 못했다. 또한, 그는 괴도 키드의 쇼를 직접 보러 가지도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뉴스를 통해 그의 소식을 보는 것뿐이었다.
‘맞다, 요전에 한 번 들렸지.’
요전에 그가 정말로 죽을 뻔한 퍼포먼스를 보고서, 자신과 아카코는 바로 그에게 갔다. 전에는 적당한 선에서 멈췄다고 한다면, 그때의 그는 그 선을 넘었다. 분명하게. 하쿠바 사구루는 제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머릿속이 어지럽다.
“사구루? 왜 그러고 있어?”
“…아, 아카코.”
“왜 그러고 있냐….”
-니까? 이어지려던 말이 흩어진다. 사구루의 얼굴을 본 코이즈미 아카코는 다시금 물으려다가 말았기 때문에.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TV 속 상황이 정적을 채워나간다.
-키드님! 안 돼요!
-마지막 쇼라니 거짓말이죠?!
-키드님! 위험해요!
-키드!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당장 내려와!
괴도 키드는 자신을 걱정하는 말들을 무시한 채 난간 위에 섰다. 그 모습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오직 그의 균형 감각만으로 버티는 모습이었다. 마치 새가 나는 준비를 하듯이, 그렇게.
“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코이즈미 아카코는 새된 소리를 질렀다. 사구루는 그런 아카코에게 제 옆에 앉으라는 듯, 소파를 쳤다. 아카코는 하쿠바 옆자리에 쓰러지듯 앉았다. 툭, 약간 붉은 빛 도는 머리칼이 남자의 어깨 위로 흩어진다.
“미친 거 맞지…?”
“…….”
“아니 미친 게 분명해. 저건 자살 행위라고.”
아카코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그 속은 자괴감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을 거라고, 하쿠바 사구루는 생각했다. TV 속 괴도 키드는 미동이 없었으며, 사람들의 목소리와 바람 소리가 오디오를 가득 채웠다. 그때였다.
띠링-.
둘의 정적을 뚫은 경쾌한 소리가 울린다. 사구루는 제 핸드폰을 꺼내었다. 그리고 떠 있는 메시지 아이콘.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안감에 하쿠바 사구루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약간 떨리는 손가락이 메시지를 클릭한다. 하쿠바 사구루는 숨을 들이켰다.
[-보낸 이 : 쿠로바 카이토.-
제목 : 안녕.
이제 더는 너희와 이야기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이렇게 보낸다. 친구인 너희에게는 아무래도 먼저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부디 너희만큼은 내 마지막을 보고 놀라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남겨. 미안하다.]
사구루는 덜덜 떨리는 손을 간신히 가다듬은 채, 아카코에게 내밀었다.
“아, 아카코. 이것 좀, 후우 봐요.”
“…뭔데 그래….”
“…직접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아카코는 제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내려 화면을 바라보았다. 사구루는 속으로 셋을 세었다. 하나, 둘.
“뭐야, 얘 지금?!”
셋.
사구루가 예상한 것과 같이 코이즈미 아카코는 또다시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는 것을 사구루가 간신히 어깨를 눌러 막아냈다. 아카코가 고개를 휙 돌려 제 남자친구를 쳐다보았다. 이유를 묻는 듯한 진홍색 눈에 사구루는 다시 핸드폰을 내밀었다.
[-부탁할게. 찾아오진 말아줘. 잘 지내.]
그러면서 하쿠바 사구루는 고개를 저었다. 코이즈미 아카코는 잠시 화를 참다가, 몸에서 힘을 빼었다.
“왜? 우리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알잖아요.”
“하아….”
아카코는 다시 사구루의 어깨에 제 머리를 얹었다. 결말은 정해져 있다. 둘은 그저 그의 마지막을 지켜봐야 한다.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그것뿐이었다. 그러니까 더 비참해지는 것이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까아악-!!
-키드-!!
TV 속 사람들이 경악한다. 둘은 동시에 눈을 감았다. 커피가 식은 지는 오래되었다.
10.
커다란 새가 추락한다.
온갖 목소리가 섞인 틈으로 하얀 날개를 휘날리며 떨어지는 그 모습은 하나의 명화와도 같았다. 순간의 정적이 흐른다. 사람들은 동시에 생각한다. 저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동시에 너무나 편안해 보여서 그들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조금 뒤에 곧 누군가가 소리친다. 그러자 하나, 둘 조금씩 늘어간다.
“키드님!”
“키드!”
다시금 시끄럽게 외치는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운다. 귀가 멍해지고, 눈이 흐려진다. 괴도 키드, 아니 그 안의 쿠로바 카이토가 생각한다. 곧 네 곁으로 갈게, 기다려줘. 후련하다. 그가 미소를 머금었다. 실로 1년 만이었다.
“아오코….”
익숙한 환상이 자신을 끌어안는다. 다정하고 상냥한 푸름에 쿠로바 카이토는 가만히 눈을 감는다. 상냥한 손길에 그의 미소가 짙어진다.
또한, 그의 추락을 보던 하쿠바 사구루와 코이즈미 아카코는 탄식한다. 결국, 네가 추락하고 마는구나, 하고.
-외전. 나카모리 아오코의 이야기-
나카모리 아오코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곧 겨울이 오는 것을 알리듯 마른 가지에 달랑거리는 나뭇잎이 보인다. 꼭 자신과 같이-.
‘위태롭네.’
그녀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아오코-. 저를 부르는 소리에 여인이 밝은 목소리로 답한다.
“왜-?”
아침이었다.
* * *
“이번 겨울은 넘기기 힘들 것 같아요.”
“아, 그런, 가요.”
“이만큼이나 버텨온 것도 대단하다는 거, 알죠?”
“네, 선생님.”
잘 알고 있어요. 여인이 미소를 짓는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는 웃음을 머금은 여인을 향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다. 그럼.
“감사합니다.”
여인은 문을 닫고 나왔다. 후우- 괜찮았겠지. 나카모리 아오코는 제 감정을 숨기는 일에 능했으면서도 작은 걱정을 무시하지 못했다. 어느새 병원 정문에 도착한 여인은 커다란 유리문을 밀어 열었다. 지이잉-. 가방 속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아오코는 핸드폰을 꺼내었다.
[♥너의 남자친구 쿠로바 카이토♥]
풉, 이게 뭐야. 화면에 떠 있는 글자가 순간의 걱정을 날려버린다. 실없는 걱정을 밀어두고서 아오코는 전화를 받았다.
“쿠로바 카이토 씨, 타이밍 너무 잘 맞추는 거 아닌가요?”
-제가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맞추는 거 모르셨나요, 나카모리 아오코 씨?
푸흐흐, 하고 제가 웃자 핸드폰 너머로 제가 좋아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서-.
“오늘은 공연 없어?”
-응-. 오늘은 제 여자 친구님과 같이 시간 보내고 싶었는데-.
일어나 보니 없네. 어딘가 시무룩한 목소리에 아오코는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아, 역시 조금 무섭다. 조금 울컥해지는 마음을 다잡고 아오코는 입을 열었다. 제발 이 동요가 눈치 좋은 그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그렇게.
“앗, 버스 금방 온다. 그래도 도착하려면 한 30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음- 그럼 먹고 싶은 거 있어?
“뭐야 해주게?”
-요즘 세상에는 배달앱이라는 게 있다구요, 아가씨.
“그게 뭐야! 하하, 그럼 난-”
버스가 도착함과 동시에 전화가 끊겼다. 버스에 올라타고 자리를 잡았다. 스르륵, 움직이는 버스에 몸을 묻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올라오는 무언가를 깊게 억눌렀다. 이를 악물고서 시선을 창문으로 고정했다.
언제나처럼 나카모리 아오코가 감정을 참았던 방법이었다.
* * *
창을 통해 스며들어오는 햇살이 눈꺼풀을 두드린다. 여인의 미간에 주름이 만들어졌다가 다시 펴진다. 두어 번 눈을 끔벅거리자 흐려진 시야가 조금씩 뚜렷해져 간다. 제 허리에 감긴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같이 곱슬곱슬한 머리칼 사이로 깊게 잠든 얼굴이 보인다.
분명 곧 겨울임이 분명한데, 이 품에만 안겨 있으면 언제나 봄인 것만 같다. 여인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번진다. 그에게 갇힌 몸을 꼼지락거리며 팔을 조심스레 빼내었다. 그리고는 손끝으로 그의 머리칼을 살살 정리했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오늘 그에게 약속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오코가 입을 열었다.
“카….”
목이 약간 아파져 왔다. 물이나 먹고 올까. 여인이 제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폭신한 침대에서 내려와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찬물을 유리컵에 담았다. 찬물이 식도를 넘어가니 조금 나은 기분이다.
하아, 유리컵을 다 비우자, 약간 머리가 띵해져 오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곧 올라오는 기침에 다급히 근처에 있는 티슈를 뽑았다. 한동안의 잔기침 세례가 이어졌다.
“하아, 하아.”
설마, 하는 기분에 하얀 티슈를 내려다보았다. 새빨간 선혈이 보인다. 아오코는 피가 묻어있는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 제발, 아직은 안 되는데.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이 평화를 깨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만 버텨줘.
쏴아아-. 흐르는 냉수를 손에 담아 얼굴을 적셨다. 분명 냉수일 텐데, 분명 그럴 텐데 왜 미지근한 느낌이 들지? 나카모리 아오코는 숨죽여 흐느꼈다. 그렇게 여인은 열댓 번을 그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제 얼굴을 씻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여인은 고개를 들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린 듯한 미소가 그려진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그래, 나카모리 아오코! 정신 차리자.”
뺨을 짝치고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자, 다시 올라가자. 그렇게 나카모리 아오코는 침실로 올라가 곱게 잠든 제 남자친구를 눈에 담았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나카모리 아오코는 제 속의 기둥이 무너짐을 느꼈다. 처음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없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담담하게 자신의 끝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이 남자만 보면 외면하고 싶게 된다. 여인이 작게 속삭인다.
결코, 이 남자에게 영원히 전하지 못할 말을, 진심을 담아서, 그렇게.
“쿠로바 카이토씨, 나 없어도 잘 지내줘요.”
그저 한때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보내야 해요. 그렇게 언젠가 나카모리 아오코를 잊을 때까지 살아서-.
“-아 그건 좀 슬프다. 음, 그럼 나중에 그런 아이도 있었구나- 라고 생각해줘. 그러면서 행복하게, 평온하게. 네가 좋아하는 마술을 사람들에게 선보이면서. 네가 나에게 웃음을 준 것처럼,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해줘. 내 사랑, 쿠로바 카이토씨.”
정말로 사랑해.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다급히 닦아냈다. 아직 안 끝났단 말이야.
“있잖아, 카이토. 너만 보면 계속 욕심이 났어.”
나한테 시간이 없다는 건 금방 알았고 담담해지기로 다짐까지 했는데, 왜 너만 보면 이 다짐이 다 무너질까. 이 5년마저도 너와 더 함께 있고 싶은 내 욕심이었단 걸. 여인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다시금 속삭였다.
“사랑해, 사랑해. 카이토.”
마른 시트 위로 보기 싫은 자국이 번져간다. 여인은 조금 따가울 정도로 눈물을 훔쳤다. 이제 그를 깨워야 했다. 아직은, 아직은 괜찮아. 그러니까-.
‘조금만 더 욕심내도 되지 않을까?’
“카이토, 일어나.”
나카모리 아오코는 목을 소리 없이 가다듬고 말한다. 부디 그에게는 평소와 같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손의 떨림이 잦아든다. 그제야 손끝으로 그의 머리칼을 조심이 정리할 수 있었다. 얼굴을 작게 찡그리는 그의 모습에 아까의 슬픔은 어디 갔는지 웃음이 새어 나온다. 나카모리 아오코는 약간 나아진 목소리로 다시 그에게 속삭인다.
“오늘은 어디 가야 한다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