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사를 할 때는
푸른 장미를
농
이건 아니잖아.
물기 어린 소년의 작은 목소리가 공허한 하늘에 울려 퍼졌다. 진득하고 습한 공기가 탁하게 내려앉은 지독히도 덥던 어느 여름, 소년의 세상이 산산이 부서졌다. 소년은 제 몸통보다 작은 백색의 도자기를 끌어안았다. 온기가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제가 모든 걸 바쳐 사랑한 작고 작았던 아이의 그 웃음이 선명했다가 눈물이 맺혀 흐려졌다. 한참을 미동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던 소년이 도자기를 끌어안은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등 뒤로 어른들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와 따라오다 멈추는 발소리가 쫓아 내달려왔다. 소년은 목적지를 명확하게 둔 채 달렸다. 빠른 속도와 더운 바람에 가벼운 눈물이 뒤쪽으로 떨어지며 그가 가는 길을 알렸다.
눈물 젖은 그 길을 따라가보면 그들의 추억이 있지. 소년, 소녀에게 꽃을 건네주던 그 장소. 그를 평생 쫓으며 사랑하게 될지는 모르고, 아파하고, 괴로워하지만 절대 놓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고.
“나는 쿠로바 카이토야. 잘 부탁해.”
⁑
띠리리릭-. 띠리리릭-.
카이토의 눈이 언제나와는 다르게 번쩍 떠졌다. 저도 생경한 느낌에 한참씩이나 천장 벽만 바라보던 카이토가 현실감 없는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상투적인 소리로 요란하게 울리고 있는 알람시계를 마주했다. 아침 7시. 커튼을 친 창문으로도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카이토의 발치를 뜨겁게 달구었다. 암막 커튼으로 바꿀까. 이 와중에도 햇빛을 귀찮아하던 카이토가 알람시계와 배턴터치를 하듯이 울리는 휴대전화를 신경질적으로 잡아챘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하는 불청객이 누군가 했더니, 역시.
“아호코! 시끄럽잖아!”
“시끄러운 건 네 쪽이야, 바카이토! 친절하게 모닝콜 해주는 거잖아? 그러면 얌전히 고맙다고나 하라고!”
“네가 모닝콜 받아봐라. 고맙다는 소리가 나오게 생겼나.”
“흥, 됐어! 아오코는 기껏 카이토 지각하지 말라고 전화해 준 건데. 역시 카이토는 바보야! 베-”
전화가 불시에 끊기고 아오코, 아오코? 불러봐도 들려오는 건 규칙적인 삐- 소리뿐이다. 카이토는 깜깜해진 전화기 화면에다 대고 아침부터 성질머리하고는. 하며 핀잔을 주고는 휴대전화를 팍하고 뒤집어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아오코의 모닝콜은 오랜만이네. 카이토가 침대에서 꾸물꾸물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그야말로 몇 달 만인지. 아오코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혼수상태인지 두 달이니까, 그래, 딱 두 달 만이다. 그때가 눈 오는 겨울이었는데 벌써 봄이 와서는 밖에 벚꽃이 살랑대니까. 그래도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한 기운이 가시질 않은 초봄.
“……봄이라고?”
카이토의 손에서 하복용 셔츠가 떨어졌다.
“아오코!”
“어제저녁은 아빠가-, 어라. 카이토. 웬일로 이렇게 빨리 오고 말이야.”
거봐. 아오코가 모닝콜 해주니까 지각도 안 하고 좋지? 그러니까 빨리 고맙다고-
-해.
아오코의 명랑한 목소리가 끝에서 별안간 힘을 잃고 카이토의 품에서 먹혀들어 갔다. 재잘대던 아오코를 한 품에 가득 끌어안은 카이토가 초조하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꿈이야? 아오코. 꿈인 거야? 나타나 준거야? 아오코. 아아, 아오코. 아오코.
“잠시만, 카이토, 놔, 왜 이래! 꿈은 무슨, 아니야!”
“… 꿈이 아니야?”
“그래! 아오코가 모닝콜도 해줬는데 잠이 안 깬 거야?”
그제서야 힘없이 아오코에게서 떨어진 카이토가 여전히 꿈꾸는 듯한 얼굴로 아오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게 꿈이 아니라면 뭐지? 멍하니 있던 카이토가 제 명치를 강한 힘으로 내리쳤다. 제가 쳤지만 급히 몰려오는 아픔에 신음을 내며 비틀거리는 카이토를 부축한 아오코가 카이토의 등을 마구 내리쳤다. 할 일이 없어서 이젠 자기 자신을 때리냐고. 카이토는 작은 손에 어울리지 않는 매운 주먹에도 실없이 웃었다. 꿈은 그쪽이었구나. 나는 길고 긴 악몽을 꾼 거였구나. 현실에는 이렇게, 네가 여전하구나.
“그럴 거면 가서 빵 좀 사 와.”
“보고 싶었어.”
“뭘?”
“널.”
6개월의 악몽을 지나 만난 너를 아리게 그리워했어. 카이토는 환하게 웃었다. 아주 어릴 적 처음 만났을 때 장미꽃을 전해주던 마치 그때처럼. 한참을 넋을 놓던 아오코도 곧 그를 따라 웃었다. 그야 뭐가 어찌 되었든, 함께 웃을 수밖에 없는 웃음이었으니까.
“카이토, 악몽이라도 꾼 거야?”
“응. 엄-청나게 끔찍한 악몽.”
“헤에. 뭔데? 아아, 하긴 카이토가 무서워할 거라면, 아쿠아리움에 혼자 남겨지기라도 했어?”
“바보. 그런 시시한 게 아니야.”
아, 물론 그것도 끔찍하긴 하겠지만… 급하게 첨언하는 카이토에게 아오코의 비웃음이 날아들었다. 역시나. 생선을 무서워하다니, 불쌍한 물고기. 허공을 쳐다보며 아련한 표정을 짓는 아오코를 바라보던 카이토가 턱을 괴었다. 아오코는 모르는 저의 가장 큰 약점이자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가장 끔찍하고 무서운 악몽. 너무 소중하고 소중해서 평생을 아껴온 나의,
“사파이어가 깨졌어.”
여름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처음 맞는 주말이었다. 어김없이 비는 무섭게 땅으로 돌진했고 우산도 무용지물일 정도의 강우였다. 그런 날, 아오코가 또 떠났다. 들것에 실려가다 툭 너의 손이 떨어졌을 때 나는 드디어 깨달았다. 그건 악몽도 뭣도 아닌, 현실이었다고. 나는 방금 너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모래처럼 손 틈새로 흘려보냈다는 것을. 깨달은 것과 본능은 별개였는지 카이토는 죽기 살기로 아오코에게 달려들었다. 경찰들에게 막혀 너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없을 때, 뺨을 타고 흐른 것은 눈물인지 빗방울인지. 신만이 아실 일을, 그도 알려 했으니, 다시 한번 벌을 받았다.
⁑
“…토. 카이토. 카-이토!”
“……어, 어?”
“정말이지! 몇 번이나 불렀는지 알아? 먼저 놀자고 불러놓고선.”
“아, 아오코...”
“맨날 다른 생각만 하고. 너무해 정말.”
주위를 황급히 둘러보니 공원 벤치였다. 날씨는 적당히 시원해서 카이토와 아오코의 옷은 가벼운 채였다. 나무는 조금씩 붉은 것을 보니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인 것 같았다. 제 앞에 서 있는 아오코를 찬찬히 뜯어보던 카이토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아오코를 살릴 두 번째 기회구나.
“뭐, 뭐야. 사람을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아오코. 고마워.”
“뭐가?”
“그냥, 살아있어줘서.”
정말 고마워. 카이토가 아오코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당황하던 아오코가 곧 얌전히 카이토를 끌어안았다. 카이토, 아침에 생선이라도 봤어? 장난스레 묻는 아오코에게 낮은 웃음소리로 화답한 카이토가 저도 팔에 힘을 주고는 아오코를 힘껏 안았다. 제발, 제발, 할 수만 있다면 제발 이대로 시간아 멈춰라. 지켜야 해. 살려야 해. 평생 웃게만 해줘야 한단 말이야. 그만하라며 저를 밀어내는 아오코를 껴안고 놔주지 않은 채로 카이토는 울었다. 아오코에게는 짓궂은 말로 농담을 치고는 사각지대에 숨어 울었다. 그래서 네가 웃을 수 있다면 까짓것 말라죽을 때까지 울어주겠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울었다.
두 사람은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하늘 아래서 마음껏 정취를 즐겼다. 나무들은 어정쩡한 빨간색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즐거워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어느덧 노을이 나무의 불완전을 숨기는 시간이 되자 아오코는 카이토를 이끌었다. 추워지니까 이제 가자. 순순히 작은 손에 이끌려가던 카이토가 한참을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망설이다 겨우 입을 뗐다.
“아오코.”
“응?”
“이건 만약의 일인데, 만약 내가 죽는다면 말이야.”
“뭐야, 갑자기.”
아오코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이 코웃음을 치고는 앞만 바라보며 걸었지만 카이토는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물었다.
“내가 죽었는데, 다시 시간을 되돌려서 내가 죽기 전으로 되돌아간다면 너는 어떨 것 같아?”
“그런 가정은 왜 하는데?”
“아, 뭐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순간 멈춰서 저를 째려보는 아오코에 카이토가 움찔하며 말을 흐렸다. 멋쩍게 웃어 보인 카이토가 먼저 출발하는 아오코를 따라잡아 나란히 걸었다. 멀리서 자동차의 경적이 희미하게 들려왔고 바람이 약간의 소음을 내었을 뿐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카이토가 괜한 걸 물었다고 스스로를 자책할 때쯤 아오코에게서 대답이 들려왔다.
“…당연하잖아?”
“응?”
“살리려고 엄청나게 애쓸 게 당연하잖아? 만약 반대의 경우라도 말이야.”
“……”
“어라? 뭐야! 아니라는 거야?”
아오코는 정해져 있는 답변을 말하는 듯이 가볍게 얘기했다. 나도 당연히 너를 살릴 거고, 너도 당연히 나를 살릴 거라고. 카이토는 아오코에게서 느껴지는 그 맹목적인 신뢰에 순간 웃음이 날 뻔했다.
“나는 엄청나게- 까지는 아닐 것 같은데?”
“뭐야 정말! 그럼 아오코도 취소야!”
이번에야말로 널 지킬 수 있겠다고, 확신이 드는 것 같아서. 몇 번이고 지옥을 경험하더라도 살릴 수 있겠다고. 나도 널 믿고 있으니까.
“취소는 불가능하십니다, 손님.”
“그럼 카이토도 엄청 힘낼 거라고 약속해. 아오코는 어쩔 수 없이 힘내야 하니까.”
“생각은 해볼게.”
부러 장난을 말하며 웃는 카이토에게는 하나의 결심이 생겼다. 첫 번째 삶에서도, 두 번째 삶에서도 미치도록 가장 후회했던 일. 아오코에게 진심을 전하지 못한 것.
고백하지 못한 것.
“아. 저기, 아오코.”
“응? 왜, 카이토.”
“점심시간에 잠깐 시간 좀 내줘.”
“왜? 무슨 할 말 있어?”
“아, 그래. 있어.”
아오코가 긍정의 답을 하고 교실에서 나간 뒤 카이토는 제 머리를 마구 내려쳤다. 이런 방면에만 머리가 안 돌아가고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느낌이 들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카이토는 손짓은 왜 어색하냐며 오른손으로 왼손을 때리기에 앞서 말은 왜 더듬냐며 제 입을 먼저 때렸다. 반 친구들이 미쳤냐는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현재 카이토에겐 신경 쓸 거리가 못 되었다.
“정신 차려. 할 거면 제대로 하자.”
카이토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
“……카이토?”
“어? 아하하……”
“할 말이 뭔데?”
“아, 그러니까.”
카이토의 동공이 빠르게 좌우를 오갔다. 불러내긴 불러냈지만 막상 좋아한다는 말을 하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카이토는 속으로 거의 홍수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쿠로바 카이토 이 한심한 놈아. 카이토는 당장에라도 제 머리를 쥐어박고 싶어져서 황급히 반대 손으로 어느새 주먹을 쥔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너를 좋,”
“조?”
“조, 조,”
“조, 뭐.”
“조, 조명이 나간 것 같다고.”
“조명이?”
“어어. 우리 집 조명이 나가서 오늘 갈아야 하는데 형광등 사러 가자고. 같이. 학교 끝나고.”
쿠로바 카이토오오-!!!!!!!!! 카이토는 속으로 고함을 질렀다. 할 거면 제대로 하자며. 이러다가 기회 놓치면, 또 후회할래?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어느새 카이토는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다. 언제나 짧게 다듬고 있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야? 그런 걸 굳이 불러내서 말하고 그래?”
“아. 뭐. 기분 전환 삼아서.”
“카이토도 진짜 이상해. 어쨌든 오케이! 아오코가 같이 가줄게.”
“어어어, 땡큐.”
먼저 들어간다며 총총 뛰어가는 아오코의 뒷모습을 어색하게 웃으며 바라보던 카이토가 아오코가 사라지자마자 옆벽에 머리를 쾅 하고 들이박았다. 머리에서 푸시식하고 연기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자신한테 화가 나서인지 아픔 때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고 서 있던 카이토가 털썩 쭈그려 앉아 머리를 마구 헤집어대고는 아오코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치겠다…”
“이거면 되지 않아? 카이토 방, 그렇게 큰 건 아니니까.”
“어, 좋네. 그만 가자.”
“정말. 카이토 건데 잘 좀 보라고.”
방과 후, 둘은 정말로 형광등을 사기 위해 마트에 들렀다. 생각해보니 필요 없겠다는 카이토의 필사적인 변명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오코는 필요 없어도 예비용으로 사두라며 카이토를 끌고 무려 대형마트로 진입했다. 명색이 대형이라고 조명 코너는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눈이 아픈 느낌에 카이토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아오코는 보석이 가득한 곳에 온 것 같다며 즐거워했다.
“이게 무슨 보석이야?”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 바카이토!”
진짜 보석에도 둘러싸이게 해줄 수 있는데. 카이토가 점점 썩혀져 가는 괴도 키드의 순백 정장을 떠올리며 투덜댔다. 아오코를 지키는 데에 온 관심이 쏠린 터라 키드 일은 손도 못 대고 있었다. 카이토가 잠깐 옛 일을 추억하고 있을 때 아오코 또한 옛 일을 추억하고 있었다.
“그래도 가장 반짝이는 건 역시 그거인 것 같아.”
“뭐?”
“시계탑 말이야.”
“시계탑? …그, 공원에 있는 거?”
시계탑을 떠올리자 문득 아오코와의 첫 만남이 생각나 살풋 웃음을 흘린 카이토가 특이한 모양의 조명을 집고 이리저리 살폈다. 아오코는 카이토에게 긍정의 뜻을 보이고는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조금 거리를 두고 그 뒤를 따르자 이어지는 아오코의 말이 소음에 흐려져 실제보다 작게 들려왔다.
“카이토랑 처음 만난 거기. 솔직히 아오코 눈에는, 거기가 제일 아름다워.”
카이토가 툭 하고 걸음을 멈췄다. 따라오던 발소리가 멈추자 아오코도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카이토? 왜 그러냐는 뜻이 가득 담긴 그 물음에도 카이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아오코의 손을 잡고 뛰었다. 마트를 나서서, 큰 횡단보도를 건너서, 드문드문 뭉쳐 나오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서. 청명해서 바람도 살랑살랑 부는 가을 하늘 아래서 저를 애타게 부르는 소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카이토는 달렸다. 지금이 아니라면 할 수 없을 말. 본능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아이의 체온이 따스했다. 높게 솟은 시계탑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로 가까워지고 나서야 카이토는 달리는 것을 멈췄다.
“하아, 하, 카이토. 지금 뭐 하는 거야?”
“……어떻게든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러면 그냥 말하지, 여기는, 왜?”
숨이 차는지 아오코의 호흡이 짧고 빨랐다. 왼쪽 가슴께에 손을 짚고 숨을 들이쉬며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꽤나 힘든 모양이었다. 카이토는 그와 별개로 심장이 또한 뛰고 있었다. 손끝에도, 머리에도, 옆구리에도, 발끝에도 심장이 있는 것 같은 고동을 느꼈다. 카이토는 손에 차는 땀을 교복 바지에 마구 문질러 닦았다. 어느새 숨을 제법 고른 아오코가 카이토를 똑바로 마주 섰고, 카이토는 제 마음을 마주 볼 용기가 생겼다.
“여기에서 하고 싶었어. 특별한 말이니까.”
“무슨 말? 시계탑이잖아, 여기서?”
카이토의 손끝에서 푸른 장미가 아름답게 피어났다. 하얀 연기와 함께 나타난 장미는 아침 이슬을 머금은 들꽃처럼 청초했고 잘 손질된 정원화처럼 반짝였다. 카이토가 손을 아오코에게로 살짝 내밀었다, 아오코의 시야에 그때와 같은 파란 장미가 가득 찼다.
“안녕. 난 쿠로바 카이토야.”
그때와 같은 언어와 한 떨기 장미로, 그때와 같은 장소에서, 그때와는 다른 마음으로.
“널 좋아하고 있어.”
좋아한다는 마음을 한껏 담았다. 혹여나 흘러넘칠까봐 노심초사해왔던 그 마음을 아무런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그대에게 보였다. 몇 번이고 바보같이 말하지 못했던 이 미안하고도 애틋한 감정이 고스란히 네게 전해졌으면 하는 바보 같은 소망을 빌었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가장 행운의 날이었던 너를 만난 날처럼 네게 파아란 장미를 건넸다.
꽃을 받아든 아이는 어쩌면 우는 것도 같았다. 투명한 방울을 그렁그렁 매달고서는 방싯 웃어 보이니 눈물이 견디지 못하고 볼록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와 전혀 변하지 않은 건 또 한 가지가 있었다. 시리게 사랑스러운 너의 미소가 그러했다.
⁑
그 누군가 그랬지. 시간 도깨비는 지루한 시간은 싫어해서 먹지도 않지만, 즐거운 시간은 좋아해서 마구 먹어치운다고. 그 말이 정말 사실이었던 걸까-하고 카이토는 요즘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오코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고 사귀게 된 지도 9달이 흘렀다.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카이토와 아오코는 남들이 질투할 만큼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가끔 투닥투닥 하며 다투기도 했지만.
“카이토는 정말 바보야! 아오코 마음도 모르고…”
“그러니까, 그런 말이 아니었다니까. 오해야.”
“몰라. 바카이토 보기도 싫어.”
아오코 갈래-하고 등을 보이면 무슨 일 때문이었든지 카이토가 한발 물러서 꼬리를 내리는 것이다. 미안하다며 온갖 교태를 부리는 그를 보고 있자면 저게 사람인가, 강아지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런 평화롭고 일상적인 여름을 맞이하는 카이토는 착각에 빠졌다. 이대로 이 느른한 분위기가 계속될 것이라는 한심하고도 안타까운 착각에.
매미 소리가 신경을 거스르고 더운 바람조차도 불지 않는 여름.
“카이토, 카이토!”
“왜, 아오코.”
“우리 캠핑 가자! 이번 주말에 시즈오카로.”
“갑자기 캠핑? 게다가 시즈오카-?”
잔뜩 흥분한 아오코가 카이토의 책상을 부서져라 내려쳤다. 갑자기 이번 주말이라고 하는 거 보니 아오코의 아빠인 나카모리 경부가 기적적으로 이번 주말에 시간을 낸 게 틀림없었다. 카이토는 한 쪽 손으로만 턱을 괸 채로 아오코를 올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그렇게 좋나.
“아저씨가 어쩐 일로 주말에 휴가를 내고?”
“응? 갑자기 아오코 아빠는 왜?”
“응? 아저씨가 가자고 한 거 아니야?”
“아닌데?”
“응?”
이 바보 같은 물음표 행렬에 마침표를 낸 것은 아오코였다. 그는 카이토에게 혼자 왜 착각을 하고 있냐며 마구 타박했다. 아빠는 이번 주말도 당연하게 야근일 거라는 소리를 듣자 카이토는 그제서야 제가 잘못된 판단을 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럼 누구랑 가자는 거야?
“당연히 카이토랑 아오코잖아?”
“아- 나랑 너만? 그럼 처음부터 그렇-, 잠시만, 뭐?”
태평하게 대꾸하던 카이토가 별안간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박찼다. 벙벙하게 서 있는 카이토에게 왜 그러냐며 꿀밤을 한 대 먹인 아오코가 순간 귀를 막았던 손을 뗐다.
“그럼 누구랑 가게?”
“아, 아, 아, 아니, 우리… 우리 둘만?”
“어? 뭐, 그렇지.”
“왜, 왜?”
진작에 얼이 빠져 있었던 카이토와 달리 아오코는 이제야 조금은 쑥스러운 듯 굴었다. 붉은 얼굴을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대던 아오코가 한참 뜸을 들이다 아주 작고, 작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이었으니까.”
“응?”
“…남자친구랑 둘이 캠핑 가는 거, 소원이었으니까.”
사귄 지 반년이 훌쩍 지나 이제 곧 1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여전히 뭐가 그리 쑥스러울 게 많은지, 아오코의 남자친구 발언에 또 얼굴을 붉히는 둘이었다. 카이토는 헛기침을 하며 창밖만 쳐다보다 얼굴이 잔뜩 벌게진 아오코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가자.”
“어?”
“가자고. 소원이라는데 가야지.”
괜히 퉁명스럽게 대답한 카이토에게 눈물을 머금은 아오코가 매달렸다. 카이토는 목이 졸린다며 아오코를 떨어뜨려 놓으려 했지만 아오코는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끈질긴 아오코에 포기한 카이토가 에라 모르겠다, 는 심정으로 그를 껴안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연인은 알지 못했다. 이 캠핑이 둘의 미래에 있어서 얼마나 큰 전환점이 될지.
“카이토-! 와! 저것 좀 봐. 구름이 산에 걸린 것 같아. 예쁘다, 진짜.”
“그러게. 날씨도 적당하고. 날 잘 잡았어.”
“아오코 초이스가 딱 들어맞았지?”
“어이구, 장해요, 장해. 아, 아오코-! 그러다 넘어져!”
어느덧 주말, 둘은 기차를 타고 캠핑장으로 향했다. 날씨는 청명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가을 하늘이 어우러지는 산들바람의 향연이었다. 캠핑에는 절호의 날씨였고 덕분에 둘의 기분도 최고조였다. 아오코는 신이 나서 들판을 아기 토끼처럼 뛰어다녔고 카이토는 그런 아오코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어라. 카이토. 이리 와봐.”
“왜?”
“여기 산책로가 있어. 저 산으로 쭉 이어지나 봐. 가보자!”
“뭐? 밥은 안 먹고? 나 아침도 못 먹었단 말이야.”
“아오코는 먹었지롱. 빨리!”
“아오코! …하. 기다려!”
들판의 끝에서 끝까지 종횡무진하던 아오코는 마침내 작은 산책로까지 발견해냈다. 모험을 즐기는 용사처럼 발을 동동 구르던 아오코는 금세 돌진했고, 카이토는 역시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뒤처졌다, 나란했다, 오락가락하며 한참을 걷던 둘은 울타리로 막힌 곳까지 다다랐다. 카이토가 옆에 있던 나무를 오르는 설치류의 동물에 관심을 쏟는 사이 아오코는 울타리 근처에 세워진 푯말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절벽 조심. 아, 절벽이 있나 보네. 그래서 울타리가 이렇게 높은가?”
“청설모가 있네. 아오코! 절벽은 조심해.”
“알고 있어-. 아, 카이토! 다람쥐가 있으면 아오코한테 알려줘야지!”
“다람쥐가 아니고 청설모.”
비슷한 거 아냐? 아오코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울타리에 기대어 섰다. 다람쥐가 어디 있냐며 기웃대는 아오코에게 청설모라고 한 번 더 알려준 카이토는 아오코가 울타리에 기댄 것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오코. 위험하게 거기서 뭐 하는-.”
찰나였다. 자칫하면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찰나의 순간에 카이토의 머릿속에 전구가 켜진 듯했다. 하지만, 뭔가 알아챈 영광의 순간은 아니었다. 카이토의 머릿속에 켜진 것은 붉고, 위험한 경고등이었다.
한 번 더 놓치게 될 거라는.
“아, 아오,”
차마 네 이름을 다 담기도 전에 견고해 보이던 울타리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적 소리와 함께 울타리는 가루처럼 부서졌고, 아오코의 입에선 단말마의 비명이 먹혀들어 간 채 그의 몸은 그대로 뒤로 기울었다.
“아오코!!”
“카-”
카이토의 상체가 앞으로 먼저 나가며 즉각 반응했다. 모든 슬롯이 어색하게 뒤틀리며 순간순간을 찍어내듯이 담았다. 애처롭게 뻗어진 카이토의 손끝에 아오코의 모습이 흐릿하게 걸쳤다. 눈도 깜박하지 못한 채 달려가던 카이토의 시야에서 소녀는 점점 뒤로 젖혀져만 갔다. 아오코의 시야에서도 카이토가 사라져갔고 허공에 몸이 뜨는 느낌에 결국 그는 눈을 감았다.
“아오코!!”
하지만 곧 들려오는 카이토의 외침과 손에 닿아오는 온기에 아오코는 눈을 번쩍 떴다. 강하게 당기는 힘에 몸이 확 끌려가 카이토의 뒤로까지 내동댕이쳐질 만큼 센 힘이었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힘의 반작용으로 아오코를 끌어당긴 동아줄은 추락했다.
“카, 카이토!”
왜였을까. 어째서 나는 넘어져있었을까. 두 발로 서있었더라면, 어쩌면 빨리 달려가 허공에 들려진 네 손을 잡아챘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왜 그랬을까. 너는 왜 나를 살리려고 자신까지 위험하게 만들었을까? 두어 발 정도밖에 안 내디딘 것 같은데, 시야에 네가 없다. 마치 환상이었다는 것 마냥, 사랑하는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찔하게 푸르다. 네가 주었던 푸른 장미가 그러했던 것처럼.
“……”
목이 멨다. 현실감이 없어 감각이 사라졌다. 눈물은 인식하지 못한 채 나오는 것이었고 심장께를 그러쥐는 손도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억, 억, 소리만 나오고 네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네발로 기어 절벽 끝으로 가도 네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카이토. 카이토. 카이토.”
평소엔 너무나 익숙하게 부르던 네 이름이 어색하다. 마지막으로 네가 닿았던 왼손이 여전히 따뜻한데 몇 번이고 되뇌어도 네가 오질 않아 어색하다. 카이토, 카이토, 어디 갔어. 카이토.
“…카이토-!!!”
아오코의 외침에 새들이 푸드덕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새들을 놀래킨 장본인은 땅에 엎드려 오열하고 있었다. 바싹 마른 모래로 얇게 덮여있던 산책로의 땅이 진하게 물들었다. 한참을 부동한 채 울던 아오코에게 한 소리가 닿았다.
“……아오코. 왜 울고 있어.”
낯익은 음성에 아오코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위험하다며 제게 주의를 주던 그의 모습 그대로 카이토가 서 있었다. 아오코는 거칠게 눈을 비볐다. 날이 더워 헛것을 보는 것일까? 카이토가 절 위해 남겨준 마지막 마술일까? 너무 슬픈 탓에 신께서 환상이라도 내려주신 걸까?
“카이토…”
“울지 말고 웃으랬잖아. 언제든.”
“……정말, 정말로, 카이토야?”
커다란 이슬이 그의 눈에 맺혔다. 환상이 걸어온다. 내 앞에 무릎을 꿇는다.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그의 손에서 기적이 피어났다.
“안녕. 나는 쿠로바 카이토야. 잘 부탁해.”
아오코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웃는 그를 황급히 끌어안았다. 사라지지 않는다. 꽃잎으로 화해 날아가지 않는다. 단순히 나의 환각이 아니다. 너는 내 앞에 있다. 카이토의 귓가에 그제야 터져 나온 아오코의 큰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달래듯이 등을 쓰다듬어준 카이토가 그 울음소리에 제 목소리는 묻혀도 좋다는 듯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해.”
장미에는 파란색을 내는 색소 델피니딘(Delphinidin)이 전혀 없기 때문에 푸른 장미란 존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을 통해 현시대, 푸른 장미는 버젓이 우리 앞에 존재하고, 그 꽃말은 ‘불가능’에서 ‘기적’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그들의 이야기이다. 알 수 없는 좌절과 아픔이 비에 쓸려 내려가고 다시 사랑에 씻겨 내려가서 기적을 만드는 것.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기적을 만들어 내는 이야기는 소년이 피워낸 푸른 장미에서 기인하였다.
⁑
카이토는 제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꼈다. 멀어져만 가는 절벽의 끝자락과, 온몸으로 느껴지는 바람, 빠르게 바뀌는 풍경. 카이토는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감히 평화에 취해 행복을 느낀 죄, 위험을 잊고 순간을 즐긴 죄로. 그렇게 아득한 절벽에서 떨어지는 동안 카이토는 눈을 감았고, 안타깝게도 그가 들을 수 없을 때 기묘한 목소리가 닿았다.
‘드디어 내 시험을 통과했구나.’
엎드려 통곡하는 아오코에겐 차마 보이지 못한 빛이 그를 집어삼켰다. 가장 소중한 목숨을 살리기 위해 가장 숭고한 제 목숨을 바친 자에게는 그에 걸맞은 은총이 내리는 법이다. 흔히들 말하길,
기적
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