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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드뷔시 - 달빛

FriendZone

체스카

“으아악!”

쿠로바 카이토, 낭랑 17세. 나름 행글라이더 조종에 소질 있다고 생각할 찰나였다. 하얀 옷을 입고 집에 기어들어오는 건 대놓고 나를 잡아가라, 라고 말하는 게 분명했기 때문에, 항상 근처에 착륙해 옷을 갈아입고 집까지 걸어오는 건 불문율이었다. 똑같이 착륙하던 장소에 발을 딛으려고 하던 순간, 약한 바람이 불었다. 완전한 하늘도 아니었고, 꽤 낮은 장소였기에 프로펠러도 접은 상태였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바람에 그대로 날아가고 말았다. 카이토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겨우겨우 행글라이더를 잡았다. 하지만 자신의 집 근처이기도 하고, 주택가가 널려있었기 때문에 맥없이 누군가의 집 베란다에 떨어지고 말았다. 참으로 어이없는 실수였다.

이크, 일단 착륙했으니, 누가 보기 전에 도망가야만…….

덜컹.

“……?”

헉, 카이토가 헛숨을 들이켰다. 행글라이더를 접고 몸을 일으킨 지 얼마 되지 않아, 들켜버렸다. 재빨리 도망가기엔 늦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무마하고 가야하는데, 베란다 밖으로 익숙한 집이 보였다.

저건……우리 집인데? 그렇다면 여기는 설마,

“…!! 괴도키,”

“쉬잇, 쉿!”

키드가 빠른 몸놀림으로 소리를 지르려는 아오코의 입을 틀어막았다. 얼굴이 보일랑 말랑한 거리까지 다가와 자신의 입을 막고 놔줄 기세를 보이지 않자, 아오코가 키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 지르지 않기로 해요.”

키드가 손을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 뒤에 짧게 미안해요, 라고 사과를 건넸다. 아오코는 그가 사과를 했건 말건 그의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긴 어떻게……아니, 왜 왔죠?”

누가 나카모리 형사의 딸 아니랄까봐, 바짝 날을 세웠다. 카이토는 아오코가 키드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알지만, 괜히 서운했다. 하지만 지금 아오코에게 서운함의 여부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자신은 지금 나카모리 아오코의 소꿉친구 쿠로바 카이토가 아니라, 세상을 마술로 홀린 괴도키드였으니까. 키드는 서운한 기색을 숨기며, 뻔뻔하게 대답했다.

 

“아쉽게도, 제가 찾는 보석이 아니어서……. 돌려드리러 왔습니다.”

사실 보석을 돌려주는 시간은 대부분 일주일 내였다. 판도라인지 여부를 확인한 뒤 바로 돌려주고 떠나는 경우도 있었고, 오늘처럼 돌아오는 길에 확인하다가 판도라가 아니면 나카모리네 집을 통해서 돌려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가끔은 아오코로 변장하고 돌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뭐어, 이것 때문에 의심 산 적이 있었지만, 잘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침 오늘은 바로 돌려주지 않아서 오히려 적당한 핑계거리가 생겼다.

“무슨…….”

아오코의 손이 키드의 손에 끌어당겨졌다. 아오코가 급하게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손에 담겨지는 무게감에 몸에서 힘을 뺐다. 설마……. 자신의 손 위를 덮고 있던 키드의 손이 사라지자, 손수건 위에 잘 놓여있는 보석이 보였다. 틀림없이, 오늘 훔쳐가겠다고 예고한 그 보석이었다. 오늘은 현장이 위험하다며 자신의 아버지가 오는 걸 만류했었다. 그래서 사진으로만 보고, 아버지가 오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아오코가 달빛에 빛나는 보석을 바라보았다가, 그 달빛을 등지고 서있는 키드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의 집에 보석을 돌려주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항상 우편함이나, 다른 경로를 통해서 돌려주곤 하였는데, 왜 오늘은 굳이 자신이 있는 날 찾아와서, 그것도 직접 자신에게 전해주는 건지, 홀린 듯 아오코가 입을 떼었다.

“왜……이걸 내게…….”

키드가 아오코의 질문에,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그의 얼굴이 그림자 져서 보이지 않지만, 한참을 생각하는 듯 으음, 하고 말을 정리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생각 외였다.

“……아가씨가 좋아서?”

“에?”

“다음에 또 봐요!”

아앗! 아오코가 대답을 듣고 잠시 멍해진 사이, 키드가 달아나듯 자리를 떴다. 주변에 경찰도 없고 그를 잡을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밤이다. 키드가 나타났다고 소리치려고 했지만 이미 그는 자신의 눈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닫고 그가 사라진 베란다 난간에서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자신의 손에는 그가 준 보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뭐야.”

기분이 이상했다.

 

 

쿠로바 카이토, 하루아침에 대 괴도가 되어버린 고등학생. 그는 괴도키드가 되면서 수많은 일을 겪었지만, 이렇게 진땀 빼는 일이 또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특히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아오코와 엮일 거라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전에, 단 둘이 떨어져 갇혔던 일은 조금 예외였지만……. 이번 일은 정말 자신의 실수로 일어난 일이었다. 나름 일처리를 잘 했다고 생각했지만, 집에 돌아와서 돌이켜보니 아오코를 상대로 말도 안 되는 말을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말을 고른다고 고르다가, 본심이 나와 버린 거였지만. 그나마 자신이 ‘괴도키드’였기 때문에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다. 쿠로바 카이토였다면 수습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말 실수였다. 거기서 ‘아가씨가 좋아서’ 라니. 쿠로바 카이토 어록 실수 중 하나에 들어갈 문장이었다. 참고로, 다른 문장은 ‘아이스크림은 달콤하잖아?’다. 어쩌다보니 두 개 다 아오코에게 한 말이네, 젠장.

쿠로바 카이토는 꽤 오랫동안 나카모리 아오코를 좋아했고, 좋아하고 있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아오코를 좋아하고 있었고, 그건 고등학교를 같이 다니고 있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었다. 하필 아오코의 아버지가 괴도키드 전담 형사여서 골치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아오코에게도 자신이 괴도키드임을 숨기며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괴도키드임을 숨기는 일 과는 별개로, 자신의 연애사업은 말짱 꽝이었다. 소꿉친구로 시작해 고등학교 2학년이 되도록 아오코를 바라보기만 했다. 하굣길을 같이 하면서 눈을 마주하던 높이가 똑같을 때부터, 내려다보기까지 자신은 계속 아오코와 함께였고, 함께하고 싶었다. 다만 그게 친구가 아니라,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하아…….”

아오코의 마음을 알 수 없다. 확신도 아니고, 알 수 없다. 카이토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자신은 하루 종일 아오코 생각으로 머리를 쥐어짜는데, 아오코는 정작 자신의 생각을 할지 여부도 모른다는 게 짝사랑의 비참한 맛일까. 카이토는 풀린 정신 사이로 피어오르는 자신의 실수를 되짚었다.

-왜……이걸 내게…….

-……아가씨가 좋아서?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었다. ……아니, 잠깐만. 이렇게 머리만 쥐어뜯을 게 아니었다. 차라리, 어쩌면 잘 된 걸지도 몰랐다. 어차피 ‘카이토’로서는 아오코의 마음을 알 길이 없고, 소꿉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가 계속될 것이다. 비록 아오코는 ‘괴도키드’를 적대하고 있지만, 어제의 반응을 보면…… 지속적으로 ‘괴도키드’로 접근한다면 조금씩 경계를 풀지도 몰랐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아오코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 정말 먼 이야기가 될 것 같지만 은근 슬쩍 ‘쿠로바 카이토’의 이야기를 꺼낸다면 아오코가 생각하는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될 지도 몰랐다. 아오코의 마음이 자신에게는 꽤 중요한 요소였다. 확신이 서지 않으면 함부로 고백을 생각할 수 없다. 소꿉친구라는 관계는 정말 긴밀해 남들보다 허용할 수 있는 범위가 더 넓지만, 그게 자신이 원하는 애정 그 이상의 성애를 담은 범위는 아니라서 사람들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걸 알면서도, 이 소꿉친구가 주는 그 특혜를 버릴 수 없어서 말을 뗄 수도 없다. 입이 말랐다. 아오코를 만나는 건 행복해.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기뻤다. 하지만, 조금 더, 긴밀해지고 싶었다. 근데, 아오코가 만약 자신을 정말로 소꿉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카이토가 세운 무릎에 자신의 얼굴을 푹 박았다. ……어려운 문제다. 자신의 인생에서 아오코는 항상 중심에 있었다. 시계탑 아래에서 장미꽃을 줬던 때부터, 고등학생인 지금까지. 너랑 함께하는 시간은 항상 즐거웠는데. 재밌었던 것과는 별개로, 네가 다른 사람과 사귈까봐,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할까봐 전전긍긍했었다. 그건 현재진행형이었다. 물론, 조금 지켜보니 다른 의미로 당황스러웠다. 누구와도 사귀지 않았고,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자신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보였다. 이거 기뻐해야해, 슬퍼해야해. 그런 모습마저 귀여워. 카이토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아오코의 모습이 생각나 피식 웃고 말았다. 이렇게 많이 고민해도, 아오코는 어떤 마음인지 모른다. 카이토는 다음 목표였던 보석의 예고장이나 생각하기로 했다. 다음 보석이 뭐였더라, 의미가 자신의 상황과 비슷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FriendZone.

한쪽은 친구로 보는데, 한쪽은 이성으로 본다는 의미라던가. 신조어라고 했다. 얼마나 지독하게 짝사랑을 했으면 자신이 발견한 보석에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 카이토는 멍하니 노트북 모니터에 뜬 파란 보석을 바라보았다. ……아오코랑 나를 뜻하는 보석같네. 색깔마저 파란 것이, 아오코가 생각났다.

 

 

범행 당일, 금요일 아침. 쿠로바 카이토는 하루 종일 그 보석을 어떻게 훔칠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다. 수업을 들으면서 창문을 바라보니, 운동장에 뛰어노는 학생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어떻게 중간에 나갈까……. 어차피 키드 일을 하기 전부터 상습적으로 조퇴를 해서, 키드범행이 있는 날에 무단으로 나가도 의심하지 않았다. 수학시간. 칠판 위에 뭔가가 적혀있는 걸 한번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간단한 수식이라 암산으로도 가능한 답이었다. 교탁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둘러보다가, 혼자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카이토를 불렀다. 풀어보라고 적어준건데 혼자 풀지 않고 있으니 딱 걸렸다.

“이거 풀어봐.”

“5요.”

정답이었다. 수학을 맡은 선생님이 멈칫하며 답이 맞았으니 봐주겠다는 어투로 멍 때리고 있는 카이토를 나무라하지 않았다. 아오코가 그런 카이토를 바라보다가 평소보다 시니컬한 카이토의 반응이 이상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카이토를 바라보았다. 오늘 미묘하게 저기압이네. 카이토는 천성적으로 텐션이 높은 편이었다. 그가 원래 발랄한 성격이고, 정말 매지션처럼 휙휙 표정을 바꾸곤 해서 카이토의 의중을 읽기 어려웠다. 게다가 자신의 기분을 생각보다 쉽게 안 보이는 편이라 카이토와 오래 함께한 자신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카이토는 기분이 좋지 않다.

“……카이토, 기분 안 좋은 일 있어?”

“……어?”

“아니 그냥,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길래.”

“……별거 아냐.”

카이토는 속에서 수많은 말이 생각났지만, 차마 아오코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라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결국 정리해서 나온 대답은 겨우 이거였다. ‘별거 아냐.’ 상대의 입장에서 너는 알 필요 없다는 류의 대답. 말을 하고 아차, 싶었지만 더 이상 붙일 말도 없었다. 키드 일을 하면서 이렇게 스트레스 받는 것도 처음이었고, 보석이 마치 자신의 상황을 뜻하는 것 같아서 조사를 할 때마다 마냥 유쾌하지 않았다.

오늘 밤 10시, 완벽에 가까운 탈출 경로와 마술. 이미 다 머릿속으로도, 설계도 전부 되어있었지만 오늘 만큼은 이 보석을 더 완벽하게 훔치고 싶었다. 조바심이 났다. 이 보석을 훔쳐서, 다시 아오코에게 준다면…….

“아오코, 난 오늘 일찍 가볼게.”

“……카이토?”

“할 일이 있어서.”

“……그래.”

아오코는 카이토를 붙잡지 않았다. 분명 카이토는 웃고 있었고 평소처럼 있었지만, 아오코의 눈에는 그게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저기압인지, 아니면 정말로 할 일이 있는건지, 아니면 고민이 있는 건지. 꽤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저조한 텐션에 아오코는 맨 마지막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저기압이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될 일도 없고, 할 일은 오늘 집에 갈 핑계였을 것이다. 그럼 고민이 있는 거겠지. 심지어 그의 아버지의 기일도 아니었으니.

“…걱정이네.”

머리가 좋은 카이토가 이렇게 오랫동안 고민하고, 힘들어 할 문제라면 꽤 복잡한 문제임은 틀림없었다. 오늘 그가 기분이 좋았다면, 오늘이 키드 예고 날이라면서 반드시 오늘 자신의 아빠가 키드를 잡을 것이라고 다짐했을 거고, 카이토는 괴도키드가 보석을 잡을 거라며 투닥댔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예고 일 임을 모를 리가 없는 카이토가, 괴도키드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루 종일 조용했다. 시끄러운 사람이 조용해지니 이상하다. 항상 텐션이 높은 사람이 며칠간 텐션이 낮으니 자신도 낮아지는 것 같다. 빨리 회복했으면 좋겠네. 아오코는 비어버린 자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심혈에 심혈을 기울였던 만큼 보석을 훔치는 일은 순탄했다. 그러나 훔치면서 보석의 주인이 했던 말이 머리에 남았다.

-이 보석은 제가 훔쳐가겠습니다!

-안돼! 그건 내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주인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기 전에 현장을 빠져나왔지만, 어렴풋이 들렸던 그의 목소리는 잊기엔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FriendZone. 한쪽은 친구로 보지만 한쪽은 이성으로 본다는 의미. 그러나 보석의 주인은 ‘자신의 아내’와 담긴 추억이라고 했다. 보석의 주인은 짝사랑을 하던 사람과 결혼을 했고 그 사람이 자기 아내이기라도 하다는 건가, 카이토는 괜히 심장이 울렁거리는 기분을 받았다. 이제는 별 의미 없는 주인의 이야기였다. 이미 제 손으로 보석을 훔쳐냈고, 이 보석은 여전히 뒤처리로 퇴근하지 못하는 나카모리 경부가 없는 사이 아오코의 손에 돌아갈 예정이었다. 아오코라면 키드가 집에 왔다 갔다는 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신의 집 앞에 있었다던가, 그런 이야기를 하며 얼버무렸겠지. 왔다 갔다는 걸 알면 집안이 뒤집어질 게 뻔하니까. 카이토는 아오코의 집으로 돌아오며 달빛에 보석을 비추었다. 파란 보석이 달빛을 머금었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파랗지만, 투명한 게 아오코를 닮았다. 정말로. 오늘 밤도 혼자 있을 아가씨에게 보석을 쥐어주고, 은근 슬쩍 쿠로바 카이토의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이 보석에 담긴 이야기를 꺼내면서.

“읏차~”

첫날처럼 낙하를 실수하는 일은 두 번 발생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베란다의 난간에 착지하고 닫힌 아오코의 방 창문을 두드렸다. 아오코가 잠옷차림으로 문을 열었다가, 눈을 크게 뜨며 하얀 빛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때처럼, 12시가 넘은 밤이었다. 함부로 소리칠 수 없었다. 아오코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긴 또 왜왔어요?”

“또 보자고 했잖아요.”

“…….”

“보석을 돌려주러 왔어요. 또 보자는 것도 진담이었고.”

“왜…….”

아오코가 왜 자신에게 주냐고 말하려다가, 저번의 대답이 생각났는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목이 조금 달아오른 게, 영 타격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키드가 아오코 모르게 웃었다.

“빨리 보석 주고 가요.”

“섭섭하게…….”

“용건은 그거였잖아요.”

“아가씨를 보러 온 것도 진심이라니까, 그 말은 잘라먹네요.”

“진짜…….”

아오코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자기 몸보다 큰 잠옷을 입고 팔만 쭉 내밀어 저번처럼 자신의 손에 보석을 올려주라는 듯이 행동한다. 키드는 그 모습이 귀여워 다시 한 번 올려주고 싶지만 나름 오늘은 목표가 있었다.

“오늘 제가 훔친 보석의 뜻이 뭔지 알아요?”

“프렌드……뭐였는데, 기억이…….”

“FriendZone.”

키드가 유창한 발음으로 보석의 이름을 말했다. 아오코가 키드의 말을 듣자 그런 이름이었다고 대답했다. 이 발음이나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데, 기분 탓인가……? 아오코는 순간 스쳐나가는 목소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곧 들려오는 말에 집중했다.

“이 보석의 주인이 오랫동안 한 여자를 짝사랑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하죠.”

“무슨 의미기에…….”

“친구 사이지만, 한명은 상대를 친구로 보고, 상대방은 그 사람을 이성으로 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아오코가 그 말을 듣고 옅은 신음을 흘렸다. 꽤, 안타까운 의미이네요. 아오코는 친구사이, 라는 말에 며칠간 기분이 좋지 않았던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갑자기 표정이 좋아지지 않는 아오코의 얼굴을 보고 키드가 말했다.

“표정이 왜 그래요?”

“어……누가 생각나서요. 친구.”

“친구?”

“네. 며칠간 기분이 안 좋아보였거든요. 고민이 있는 것 같아서.”

키드는 아오코가 말한 ‘친구’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자신의 기분을 어느 정도 숨겼다고, 티 안나 게 행동했다고 생각했건만 아오코의 눈에는 다 보였던 거다. 심지어 ‘며칠’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다 눈치 채고 있었던 거다. 아무도 모르는 걸 아오코가 알아채주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미안해졌다. 키드는 별거 아니라고 하면서도, 슬쩍 자신이 왜 고민했는지 그 이유를 던졌다.

“음, 그거 역시 사랑고민?”

“에, 사랑?”

“아가씨의 친구라면 또래일거고, 고등학생이라면 사랑 고민하는 건 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사랑고민……카이토가?”

아오코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상상하지 못한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예 자각도 못하고 있었잖아. 키드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숨겼는지 되돌아봐야 했다. 왠지 모르게 쓴 침을 삼키며 자신의 손에 반짝이는 보석을 흔들었다.

“어쩌면, 이런 이유일지도?”

그러면서 보석에 시선이 가도록 흔드니, 아오코가 한참 키드와 보석을 번갈아 보다가 소리쳤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흔한 일이죠……나도 그렇고.”

“그쪽이?”

핫, 하고 주워 담기엔 늦었다. 왜 아오코 앞에서는 잘 하지 않았던 실수를 하는 건지. 마지막 말은 본심이 나와 버렸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정말 흔한 일중 하나였으니까. 키드가 난간에 앉아 푸념하듯 말했다. 아오코는 어느새 자리에 앉아 키드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저도 친구거든요. 물론 그쪽은 절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의외네…….”

“뭐가요?”

“세상의 모든 여자를 전부 꼬시고 다니면서, 정작 좋아하는 사람은 있고 심지어 그 좋아하는 사람은 그쪽을 전혀 좋아하지 않고 있다는 게.”

“아……아가씨, 그렇게 비수를 찌를 것 까진.”

“천하의 괴도키드도 별거 아니네.”

“안 그래도 이 보석 훔치면서, 계속 그 친구가 생각나서 힘들었단 말이에요.”

괜히 키드가 어리광을 부리며 말했다. 어느새 아오코의 근처에 와 같이 앉았다. 아오코가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웃었다.

“아가씨가 생각하는 그 친구……만약 사랑고민이라면, 상대는 누군지 알 것 같네요.”

“에, 누군데요?”

“누굴 것 같아요?”

키드가 반문하며 아오코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마주한 상태에서 서늘한 달빛이 키드를 비추자 모노클 너머로 그의 눈빛이 얼핏 보였다. 그 눈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도, 전부.

“말도 안 돼!”

“이렇게 귀여운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이상한데.”

“하지만 카이토는……!”

소꿉친구잖아요, 라고 대답하려다가 아오코가 말을 멈추었다. 우연히도 키드가 훔쳐온 보석은 친구를 짝사랑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이걸 훔쳐온 키드 마저 그런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마치, 정말로 카이토가 자신을…….

“그럴 리가 없잖아!”

“뭐, 아닐 수도 있겠죠.”

키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으쓱거렸다.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훤히 드러난 목이 조금 붉어진 것도 같았는데. 갑작스레 몸을 일으켰다.

“……가야겠군요. 더 있고 싶었는데.”

“왜?”

“나카모리 경부가 돌아오고 있거든요.”

아가씨와 저의 밀회를 경부에게 들켜서는 안 될 일이니까요.

키드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오코는 그 목소리가, 생각보다 달콤하면서도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이래서 키드에게 사람들이 홀리는구나. 괜히 덜컹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떠나려는 키드에게 외쳤다.

“잠깐! 보석은!”

“아가씨의 방에 잘 놓아두었으니, 걱정 마세요. ……또 봐요.”

“…….”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키드의 하얀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가, 아오코가 몸을 돌려 베란다 문을 닫았다. 괴도키드, 갑작스럽게 나타난 세기의 도둑. 그를 몇 번 보지 못했지만 생각보다 친절하고, 의외의 순정적인 모습도 있다. 그리고 가끔, 사람을 술렁이게 하는 면이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에게 미묘한 애정을 표현하고, 자신의 소꿉친구가 어쩌면 자신을 좋아할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아오코는 몸을 돌려 자신의 침대를 바라보자, 투명한 함 안에 반짝이는 보석이 파란 리본에 둘러져 있는 걸 보고 괜히 그 보석을 집었다.

이건 또 언제 갖다 둔 거래.

아오코가 괜히, 중얼거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자각하지 못했다.

 

 

“아오코~”

쾌활하게 자신을 부르는 카이토의 목소리가 새삼 그리웠다는 걸 깨달았다. 아오코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에 앉는 카이토의 표정을 보며, 고민하던 일은 다 풀린 건가, 하면서 같이 웃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이 쿠로바 카이토가 시무룩해있으면 안되지!”

“흐음……그래?”

“……걱정했어?”

카이토가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긴장을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오코는 미묘하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그가 티를 안내려고 하지만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뻔히 알지만 평소처럼 답했다.

“바카이토의 고민이라고 해봤자지! 내가 걱정을 왜하냐?”

“뭐? 아오코, 너무하잖아!”

카이토는 장난스럽게 ‘걱정을 왜 해!’라고 답하는 목소리에, 너무해! 라고 답하면서도, 아오코는 며칠간 자신을 걱정했다는 걸 알기에 자신 역시 장난스럽게 넘겼다. 오늘은 집에 같이 가자. 카이토가 맑게 웃으며 말했다.

 

“진짜, 매일 혼자 하교했다고.”

“아 미안해~ 앞으로 같이 가자~”

“바카이토, 그런 말 한지 10년째야.”

“어떻게 10년 내내 같이 등하교 하냐, 가끔은 혼자 갈 때도 있는 거지.”

“그래서, 무단으로 학교 빠진 게 자랑이다 이거야?”

“자랑은 아니지만…….”

카이토는 아오코와 대화를 하다가 자신이 100% 진다는 걸 확신했는지, 결국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며칠 내내 기분이 안 좋다, 키드 일을 해야 한다, 이런 저런 핑계로 탈주한 건 맞았으니까. 카이토는 당분간 아오코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같이 하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당분간 키드 일은 당분간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을 거고, 조사를 위해 몇 번 밤에 잠입해야하는 것 빼고는 학교생활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카이토는 매일 지나가는 하굣길을 바라보며, 새삼 아오코와 오랫동안 이 길을 걸어갔다고 생각했다. 중학생 때도 이 길을 걸었고, 고등학생이 되어 졸업할 때까지 이 길을 걸어갈 것이다. 동아리를 하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시간이 꽤 지나서 해가 저물고 있는 시간이었다. 해가 떠 파란 하늘일 때 같이 학교를 갔고, 해가 수평선을 걸치고 있는 시간에 같이 학교를 떠난다. 붉은 노을이 아오코를 비추었다. 파란색이 생각나는 소꿉친구였지만, 노을에 비친 아오코도 예쁘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자신이 어지간히 콩깍지가 끼였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생각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흘끗 아오코를 한두 번 바라보다가, 갑작스럽게 눈이 마주쳐서 급하게 눈을 돌렸건만, 아오코는 무슨 할 말이 있었는지 답지 않게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기……. 무슨 고민 있었어?”

“……어?”

“며칠 간, 기분이 안 좋았잖아. 무슨 고민 있었나 해서.”

“고민…….”

카이토가 이걸 부정해야할까, 아니면 긍정해야 할까 입을 달싹였다. 동시에 얼굴이 뜨끈거렸다. 고민이라면,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눈앞의 소꿉친구를 너무 좋아해서 어찌할지 모르겠다는 것. 아오코가 카이토의 입술을 잠깐 봤다가, 괜히 물었다는 듯, 급하게 덧붙였다.

“그, 곤란하면 말 안 해도 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아오코의 말이 뚝 멈췄다. 카이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아오코를 바라보았다. 아오코는 그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노을빛인지, 아니면 그의 얼굴이 달아오른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정말로, 진심이 담겨 있었다.

“별거 아니야. 정말로.”

“그, 그렇구나……. 카이토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어.”

“……꽤 오랫동안 좋아했거든.”

자신 너머로 보이는 노을빛을 바라보며, 카이토가 무언가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카이토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전부 처음이었다. 소꿉친구. 친구보다 더 애정을 가진 관계. 이제까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기에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 아오코는 손에 쥔 가방 끈을 꼭 쥐었다. 옅은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머리카락에 자신의 얼굴이 가려져서 카이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표정을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보다 앞에 있는 카이토를 향해 소리쳤다.

“저기, 카이토!”

“……응?”

“…카이토가 좋아한다는 사람, 아오코가…… 아는 사람이야?”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는 것도 같다. 카이토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게, 이렇게나 떨릴 일인가. 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카이토의 표정을 제대로 보기 어려운지. 용기가 나질 않는 건지.

“……응.”

카이토가 바람처럼 잔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전히, 네 얼굴을 보기 어렵다. 그렇구나. 힘겹게 제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그 순간, 키드의 말이 생각나는 걸 왜일까. 이렇게 귀여운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이상한데. 그가 가볍게 던진 말이 진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왜일까. 아오코는 깨달았다. 자신이…… 소꿉친구를 꽤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계속 너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괴도키드는 소꿉친구가 자신을 이성으로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틀린 말이었다. 소꿉친구 관계에서 친구를 이성으로 보고 있는 건 카이토가 아니라……자신이었다. 그걸 이렇게 깨달아버릴 줄이야. 아오코는 입술을 꾹 물었다. 오늘은 카이토를 볼 자신이 없었다.

“카이토……오늘은 먼저 가.”

“……아오코?”

“학교에, 놓고 온 게 있어서. 가지러 갔다 와야 할 것 같아. 미안.”

“어이, 아오코!”

카이토가 붙잡기도 전에 먼저 뒤를 돌아 뛰어갔다. 자신의 마음을 깨달아버린 이상, 적어도 오늘은 카이토의 옆에서 마냥 행복하게 웃고 있을 수 없었다. 가벼운 일상 대화조차, 제대로 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오코는 자신을 따라오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다시 학교 방향으로 뛰어갔다. 다행히 자신을 따라오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안녕, 아가씨.”

“……괴도키드도 되게 한가한가 봐요.”

이제는 놀라지도 않는다. 아오코는 예고 날이 아니었지만 불쑥 찾아온 키드가 적응되었는지 팔짱을 끼며 베란다에 앉았다. 그러면서도 귀신같이 자신의 아버지가 야근하는 날만 찾아온다. 나카모리 경부의 야근 날 정도야 쉽게 알아챌 수 있다는 건가. 아오코는 늦은 밤 찾아온 하얀 괴도를 밀어내지 않고 베란다 문을 열어놓은 채 자신의 침대에 앉아있었다.

“이젠 일어나지도 않는 거야?”

“야밤에 찾아온 불청객에게 굳이 그럴 필요성을 못 느끼겠네요.”

아오코는 삐죽거리며 말하면서도, 그가 찾아온 게 영 기분이 나쁘진 않은지 웃기만 했다. 아오코는 저번과 다르게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달빛이 비춰 긴 다리가 하얗게 빛났다. 키드가 다리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아오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미묘하게 힘이 없는 아오코의 모습에, 키드가 의문을 표하며 말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가씨가 기분이 좋지 않을까.”

아오코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키드는 어떻게 자신이 고민이 있을 때만 찾아오는 건지 의문을 표했을 뿐이다. 항상 다른 고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키드와 대화하면 몇 년 동안 본 사이처럼 편했다. 마치 카이토와 함께 있을 때처럼. 하지만 키드는 카이토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는 누군가에게 말할 리가 없는 사람이다. 어쩌면, 말해도 되지 않을까.

“……말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말해도 되는데.”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가 아오코의 귀를 파고들었다. 키드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다정한 사람이었다. 몇 번 보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꽤 다정하고, 위로를 잘 하며, 지지대가 되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마, 그가 ‘괴도키드’가 아니었다면,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겠지. 아오코는 그의 앞에선 오늘 카이토와 있었던 이야기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번처럼……해결은 아니어도, 자신의 기분을 낫게 해줄지도 모른다. 어쩌면, 위로를 해줄 수도 있겠지. 키드 역시 친구를 좋아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마음 정리를 하는 방법을 더 잘 알려줄 지도 몰랐다.

“……그쪽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죠.”

“에, 어? 그, 그랬죠.”

“마음 정리하는 방법, 알아요?”

“마음…정리?”

키드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아오코에게 되물었다. 키드가 알기로 아오코는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마음 정리할 일도 없었다. 마치 아오코의 말은 좋아하는 사람을 포기하는 방법을 물어보는 것 같았다. 아오코는 흐리게 웃으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키드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자신이 키드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게 될 줄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괴도키드’였기에, 안심하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바람 같은 사람이지만, 어딘가에 자신의 이야기를 말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전에, 친구가 고민이 있는 것 같다고,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기에… 그 고민이 뭐였는지 물어봤거든요.”

“…….”

“당신의 말이 맞았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대요.”

아오코가 차분하게 말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쭉 피고 있던 다리를 몸 안쪽으로 끌어당긴다. 몸을 잔뜩 웅크린 자세는 자신감이 없거나, 우울하거나, 슬플 때 자주 취하는 자세였다. 아오코는 가끔 아버지가 퇴근이 늦어 외로움을 탈 때 이런 자세를 취했다. 키드가 습관적으로 아오코의 자세를 보고 심리상태를 생각하며, 아오코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 목소리에, 물기가 생기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그건 맞았지만, 틀린 게 있었어요.”

“…….”

아오코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겼다. 물기를 넘어, 울음이 섞이고 있었다. 키드가 당황하며 키드로서는 단 한 번도 넘지 않았던 베란다를 넘어 아오코에게 가까이 갔다. 아오코가 더 이상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무릎에 자신의 얼굴을 감춘 채, 몸을 간헐적으로 떨며 울고 있었다. 오늘 했던 이야기가, 그렇게 아오코에게 슬픈 일이었을까. 키드는 자신보다 작은 몸을 끌어안으면서도, 아오코가 그 이야기에 왜 슬퍼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침대에 올라와 제 가슴팍에 이마를 대고, 괴롭다는 듯 떨었다. 키드는 자신의 하얀 옷에 아오코의 눈물이 묻는 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아오코의 등허리를 장갑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며 달래주었다. 그러나 다음 이어지는 말에 키드는 토닥이던 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친구를 이성으로 보고 있는 건, 아오코였어. 카이토가 아니라…….”

“…….”

“좋아해요, 카이토를…….”

키드는 아오코를 끌어안아 자신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도저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등을 토닥이던 그의 손은 이미 멈춘 지 오래였다. 아오코는 자신의 등에 올려진 손이 멈춘 지도 모른 채 그저 그 손이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완벽히 품안에 가둔 키드에게서 어쩐지 자신의 소꿉친구가 생각나, 더 눈물이 났다. 왜, 이 순간마저도 네가 생각나는지. 아오코는 목을 놓고 울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안심이 되는 와중에, 자신을 감싼 키드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는 건 알지 못했다.

 

“낯선 사람 앞에서 울다 잠들기나 하고…….”

베란다는 활짝 열려있었고, 그 베란다는 아오코의 방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키드는 자신의 품에서 울다 지쳐 잠들어버린 아오코를 들어 침대 위에 잘 올려주고, 이불을 덮었다. 눈물 자국이 남은 게 내일 눈이 붓지 않을까 싶었지만, 내일은 학교에 나가는 날이 아니니 괜찮을 지도. 키드가 기절하듯 잠들어버린 아오코의 얼굴을 한번 돌아봤다가,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재빨리 아오코의 집을 나왔다. 물론 창문은 꼭 닫고 나왔다.

미치겠네.

키드의, 카이토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뛰었다.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눈물을 쏟았던 날을 기준으로, 아오코는 빠르게 텐션을 회복했다. 눈이 부었던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카이토는 모르는 척 했다. 뻔히 이유를 알고 있으니,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고, 아오코도 대답하기 곤란할 것이다. 카이토는 아오코가 자신의 품 안에서 엉엉 울었던 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릴 적 이후로 몇 번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항상 밝았던 아오코가 다른 사람 앞에서 울어버릴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했다니. 카이토는 예상하지 못한 아오코의 고백을 듣고 덜컹거렸던 자신에게 반성했다. 아오코가 울고 있는 와중에 제대로 달래주지도 않고 제 심장소리가 아오코에게 들릴까봐 쫄리기 바빴다. 심지어 아오코를 안고 있지 않았다면 감추지 못한 표정을 아오코에게 다 들켜버렸을 것이다. 카이토는 그 이후로 키드로서 아오코를 찾아간 적이 없었다. 카이토는 이제 키드로서 아오코를 찾아갈 일이 없었다. 애초에 아오코와 친해지면 안 되는 관계였는데. 슬쩍 아오코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만 알아보려고 했던 일이 이렇게 커져버렸다. 아오코도 알고 있을 것이다. 키드는 아마도, 당분간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몰랐는데, 보석 주인, 결혼했었네.”

“그래?”

“응. 그 보석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했는데……. 나중에 보석의 주인공이랑 결혼했나봐.”

“……그렇구나.”

카이토는 기억너머를 생각하다가, 갑작스럽게 말을 거는 아오코의 말에 다급하게 대답했다. 다행히 자신이 아는 이야기였다. 카이토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사실이 들어맞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지난 날, 자신은 아오코에게 그 보석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한쪽만 성애를 담고 있던 우리의 사이도…….

“아오코.”

“응?”

“전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었지.”

“……응.”

아오코의 대답이 늦어졌다. 카이토는 그런 아오코의 모습이 귀여워, 희미하게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텐션이 다운되는 것도, 귀여웠다. 이런 식으로 귀여워하면 안 되는데.

전에,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고백했을 때처럼, 똑같은 위치에 있었다. 똑같은 하굣길, 똑같은 노을빛이 저무는 시각. 그 때로부터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놀랍게도. 아오코가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알았지만, 제 입 밖으로 ‘좋아한다.’라고 말하는 건 다른 별개의 문제였다. 카이토는 바로 말하려고 했지만, 계속 뜸을 들이다가, 머뭇거리다가 타이밍을 놓쳐 이 시간까지 흘러버렸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미묘하게 수척한 아오코의 얼굴을 보는 건 힘들다.

“아오코가 잘 아는 사람이었고.”

“…응.”

“꽤, 오랫동안 좋아한 사람이고.”

“……으응.”

아오코의 목소리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아오코의 시선이 카이토를 피해간다. 마치, 알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였지만, 카이토는 굴하지 않고 말했다. 점점 범위를 좁혀간다. 아오코도 알고 있고, 카이토가 꽤 오랫동안 좋아한 사람. 아무래도, 올해 만난 사람들은 아니겠지. 자신도 알고 있고, 카이토는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친구일 것이다.

……친구?

아오코는 왜 이 순간, 다시 키드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굴 것 같아요?

“누구 일 것 같아?”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듯, 붉게 물든 얼굴을 감추지 않으며 묻는 모습이 왜 괴도키드의 얼굴과 겹쳐 보이는지. 그리고 그 때, 괴도키드의 대답은 자신이었다. 모노클 너머로 보였던, 어딘가 달달한 눈빛이 카이토의 눈과 똑같았다. 카이토가, 키드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때의 분위기처럼, 지금도 모든 상황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저 자신의 생각일까 봐, 그가 제대로 말해주기 전 까지 확신할 수 없었다. 네가 나랑 같은 마음일 리가 없잖아.

“……몰라.”

“정말로, 모르겠어?”

카이토가 대답을 요구한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그때와는 달리 피하지 않은 카이토의 눈이 웃음으로 물든다. 자신이 마음을 자각했을 때와 똑같은 거리였지만, 어쩐지 더 떨어져야 할 것 같았다.

“뭐, 모르면 말고~”

“뭐?!”

갑자기 분위기를 깨고 앞서 가려는 카이토 때문에, 아오코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혼자 분위기는 다 잡아놓고, 이게 뭐하는 거야. 아오코가 붉어진 얼굴로 화를 낼 듯 한 기세로 카이토를 노려보았다. 몇 걸음 먼저 가던 카이토가 슬쩍 아오코를 바라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옅게 웃었다. 아오코가 그 웃음에 괜히 가슴이 간질거려서 가방끈을 꼭 쥐었다. 사실, 아오코는 카이토의 다음 답을 알고 있었다. 카이토는 울망거리는 아오코의 눈을 바라보다가, 결국 푸핫, 하고 웃고 말았다.

“좋아해, 아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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